40대가 가까워지는 즈음 인간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학창시절 목표는 무사히 빨리 졸업하는 것이었다. 졸업하면 자유로울 줄 알았기 때문이다. 마음껏 좋아하는 산을 오르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바람처럼 구름처럼 이리저리 떠돌며 여행을 실컷 할 줄 알았다. 한동안 ‘헤르만 헤세’의 수많은 글들을 읽으며 내게도 그런 삶에 대한 기회가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난 갑자기 눈에 콩깍지가 씌인 채(?) 덥썩 결혼을 하고 말았다. 그렇게 세월은 나의 목덜미를 잡고 쉬지 않고 흘렀다. 그러는 사이 늦었지만 치과를 하게 됐다. 그리고 초보원장으로 좌충우돌하면서 또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렇게 어찌어찌 바쁘게 살다보니 벌써 10년째다. 이젠 가끔씩 현재의 삶이 낯설어지기 시작한다. 이제야 조금씩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걸까? 무엇인지 모를 갈증에 목말랐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기억이 희미해졌다. 알 수 없는 열정과 호기심을 누르지 못해 방황했던 그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가 버렸을까? 결코 쉽지 않은 이 시대를 살면서 아직까지도 그런 미련이 내게 남아 있었던 것일까? 암울했던 80년대 말을 지나면서, 그
황영환(作) 74년 서울치대 졸 현) 부산 황영환치과 원장
개원한지 40여년… 후배치과의사에게 취미갖고 살라고 권하고 싶어전방근무를 하다가 1958년 마산 제 36육군병원으로 전속돼 만 6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62년 봄에 제대를 하게 돼 개업지를 택한 곳이 경남 마산시다. 32세의 젊고 혈기왕성하던 시절. 청운의 뜻을 품고 수성동 51번지에 김화석치과의원이란 간판을 걸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장군이 군사혁명을 일으켜서 도지사, 시장, 군수 등 다수가 현역군인들로서 행정을 장악하게 됐고 학교, 관공서, 사회단체 할 것 없이 모든 행정업무가 군 행정 체제로 바뀌었다. 이런 시기에 개업하자마자 감투를 쓴 것이 마산치과의사회 총무직책이었다. 이 무렵 마산에는 일제시대 검정고시 출신 의사가 많았다. 고상목 선생님이 회장이었는데 마산과 도내에서는 원로격이었다. 이밖에 이한철, 박수경, 이병도, 남정우 선생님들도 훌륭한 치과의사라고 생각된다. 지금은 다 고인이 되신 분들이다. 1963년 1월 1일자로 부산시가 정부직할시로 승격됨에 따라 부산에 있던 경남치과의사회는 마산 이전총회를 하고 부산치과의사회는 창립총회를 개최해 김상찬 선생님이 초대회장으로 선출됐고 경남회장은 마산시 회장이 겸직으로, 고상목 선생님이 선임되고
서병준(作) 81년 연세치대 졸 대전 연세치과 원장
테니스장에 가면 서너시간씩 테니스를 치고 드라이버를 치면 사람이 아니네 약물검사를 해봐야 한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고, 처음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 해서도 다섯시간은 넘었지만 완주를 했고, 수영장에 가서는 한시간 동안 2500m를 쉬지않고 자유형을 하고, 트라이 애슬로(철인3종 경기 바다수영 1.5km 사이클 40km 마라톤 10km)에 출전해서는 2시간 38분 53초로 전국에서 31위 전라북도에서는 2위로 트로피를 받아 친구들과 술을 따라 마시기도 했었다. 이 사람이 지금은 테니스장에 가서는 누가 나왔나 출석 점검하고는 구내 식당에서 쉬는 사람들과 목운동만 하고, 티삿 할때는 드라이버를 치지 못해 3번 아이언으로 티삿을 하고, 2003년 전주군산간 마라톤 풀코스에 출전해서는 전주공설운동장에 골인해야하는데 하프코스 골인지점인 군산공설운동장으로 들어오고 가끔가는 수영장에서는 물만 묻히고 대신 사우나에서 땀빼고 철인 3종 경기에 올해에는 꼭 출전한다고 말하고선 경기 안내 장이 오면 이번대회는 연습이 좀 덜됐으니 다음 대회에 나가야지 하면서 읽고 버리는 사람이 됐다. 그러던 차에 전라북도 치과의사회의 6.9제 치아의날 행사에 몇년만에 체육대회가 포함돼어 있던 것 이
조수영(作) 889년 연대치대 졸 대전 연세치과 원장
이규섭(作) 87년 단국치대 졸 현 대전 하얀이치과 원장
필자가 이런 얘기를 하는 의도는 검사가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경제적인 진료를 해야 된다는 이야기이다. 오늘날 의사들이 옛날 명의들에 비해 경제적인 진료를 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관찰하는 습관이 부족하고 감각적인 요소를 소홀히 하는데서 기인하는 듯하다. 의술만큼 경험을 많이 요구하는 학문은 없다. 이론이나 법칙을 안다고 여러 가지 질병을 잘 다스릴 수 없다. 이론이나 법칙은 기본이고 그 위에 증례에 따른(case by case) 진단이 중요하다. 다양한 진료를 한 명의들은 환자의 외형만 봐도 병의 정도를 짐작하고 진맥만 해봐도 병의 종류와 원인을 알 수 있다. 술을 많이 마셔서 배가 아파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환자가 타임캡슐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서 명의 허준에게 진료를 받는다고 가정해 보자. 의사는 먼저 환자의 용태를 살펴 볼 것이다(시진, 視診). 그 다음 진맥을 해보고 병의 경과와 상태를 물어 볼 것이다(문진, 問診). 그리고 배나 등을 두드려 볼 것이다(타진, 打診). 5분이 지나지 않아 허준은 “위염입니다. 3일만 약을 쓰십시오." 라면서 간단히 처방을 내고 5,000원쯤 받을 것이다. 각종 검사를 모두 생략하고 최대의 경제적인 진료를 할
엑스레이를 놓고 설명하면 내용을 읽을 줄 모르면서도 나의 말을 쉽게 믿는 것을 본다 머리에 약간의 충격을 입은 경미한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을 찾으면 제일 먼저 많은 엑스레이 촬영을 한다. 그런 경미한 부상인 경우 엑스레이 촬영으로 도대체 무슨 진단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우리는 자료를 남기기 위해서도 엑스레이를 찍어야 한다. 치과에서 경미한 치주 질환일 때도 엑스레이를 촬영하지 않고 치료를 했을 경우 의료보험 청구를 하면 치료행위를 인정하지 않고 진료비가 삭감이 되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에 치과에서 엑스레이를 찍지 않고 하악 유전치를 발치했는데 마침 계승치가 없어서 환자의 부모는 6개월 후 다른 치과에서 엑스레이를 찍고 난 후 소송을 걸어서 곤란에 빠진 치과 의사도 보았다. 의사의 조그만 잘못이 있어도 크게 당하는 ‘의사들의 재량권을 최소화시킨 실정법"때문에 불필요한 검사를 많이 해야 한다. 또 일부이긴 하지만 의사들의 영리적인 동기 또한 과잉 진료를 낳게 한다. 많은 영상을 찍고 여러 가지 검사를 하는 오늘날의 진료 형태를 ‘진료의 융단폭격"이라 부른다. 임상 경험이 충분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이론으로 무장된 일부 의사
이인원(作) 경희대 미대 한국학과 졸 개인전, 국내외 단체전 다수 참가 현, 한국 미술협회, 회토회 회원 서울 김종훈치과원장 부인
전날 열심히 연습했음에도 방법이 전혀 생각나지 않고 매듭은 밖으로 드러나고... 신혼 여행 후, 첫 출근날. 설레는 마음으로 아침을 차려주고 신랑이 출근준비를 마치고 나오길 기다렸습니다. 산뜻한 분홍색 셔츠를 입고 깔끔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이. 뭔가 빠져있기에 한 마디 물었습니다. “여름에는 넥타이를 안 매고 다녀도 되나보지?" “아니야. 넥타이를 맬 줄 몰라서..." 앗.제가 만난 그이는 항상 넥타이를 예쁘게 맨 모습이었거든요. “그럼. 이제까지는 어떻게 한 건데?" “아버지가 매 놓은 넥타이를 매고 다닌거지" 이렇게 해서 결혼 전에는 모르던 모습을 알게 되나 봅니다. TV 드라마에서 본대로라면 아내가 아침에 남편의 넥타이를 매주면서 옷도 매만져줘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저마저도 넥타이를 맬 줄 모른답니다. “알았어. 내가 아빠한테 배워와야겠다." 지난 일요일, 아빠께 도움을 요청했지요. “아빠, 넥타이 매는 방법 좀 가르쳐주세요. 그이가 맬 줄 모른다고 해서요." 아빠는 요즘 사람들, 넥타이 맬 줄 모르는 사람 많다면서 선뜻 가르쳐주십니다. 아빠가 하시는걸 보면 참 쉬워보이는데도, 제가 막상 해보려니 맘처럼 되지는 않더군요. 여러 번의 연습끝에 겨우 방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