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 아닌 것에도 깔깔거리며 10년전 설레는 기분으로 우리가 됐고 하나가 돼 갔다 흔히 말하는 386의 마지막 세대인 87학번으로 졸업 10년차다. 올해 4월.식목일을 앞둔 금요일. 졸업 10년을 기념한 행사를 가졌다. 그 얼마전부터 준비를 위해 실로 오랫만에 남자친구(?)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도 받고 회비독촉 전화도 받았다. 그 전화마저도 반가움을 느끼게 했고 잠시나마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20대의 내가 될 수 있었다. 오후 진료를 2시간 정도 앞당겨 끝내고 남편과 함께 전주로 향했다. 다음 날 출근해야 하는 남편은 아이들을 언니집에 맡기러 함께 동행했다. 그렇게 난 남편, 아이들과의 세계가 아닌 내가 되기 위해 설레는 기분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교수님보다 더 교수님같아 보이는 친구. 배가 많이 나와 정말 아저씨가 돼버린 친구. 결혼을 하지 않아서인지 여전히 그 모습인 친구. 10년 묻어두었던 웃음을 다 써버린 느낌이었다. 그 순간은 누구의 아내도, 두 아이의 엄마도. 치과의사도 아닌 예전의 나였다. 별일 아닌 것에도 깔깔거릴 수 있었던 그때의 내가 됐다. 근엄과는 거리가 있는 나지만 그런 웃음을 잊고 지냈었나 보다. 그렇게 우린 예전의 우리가 됐고 하나가
유태영 서울치대 졸 유태영 치과의원 원장
나에게는 아버님이 생전에 내게 주신(?) 유품이 하나 있다. 그것은 값나가는 보석류나 골동품도 아니고 그렇다고 희귀한 물건도 아니다. 나의 집 주소와 이름이 적힌 편지 1통. 그리고 그 봉투 속에는 채 쓰려다 만 편지지가 한 장 들어있다. 이것이 지금까지 내가 지니고 있는 유일한 아버지의 유품이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10여 년 전의 그 해 겨울 암으로 투병하시던 아버지께서 끝내 운명 하셨다. 평생교육자 외길 아버님 병마앞에서는 어쩔 수 없어 시골 학교의 교장으로 정년을 맞으시는 그 날까지 평생을 교육자의 외길만 걸어오신 아버지. 성품이 워낙 단호하고 엄하셔서 호령 한 마디면 우리 8남매는 잘 훈련된 병사들처럼 일사 불란하게 움직였다. 직장에서도 예외는 아니셨다. 어머니를 통해듣기로는 아버지의 그러한 곧고 분명한 성품 때문에 눈물을 보인 여선생 님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 당신이었지만 병마 앞에서만은 어쩔 수가 없으셨나보다. 장례를 마치고 유품들을 정리하게 되었다.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이며 노트, 책상 서랍 속의 물건들은 고인의 성품을 그대로 표현해 주고 있었다. 2년여를 암으로 시달리며 고통 속에서 지내온 사람답지 않게 너무도 말끔히 잘 정
고창 한찬수 대전시치과의사회 사진동호회
종가집 며느리, 홀로 자식 뒷바라지 어머니 힘겨운 삶 이제는 알 것 같다 어느 날 오후였다. "선생님, 저 기억하시겠어요?” 인사를 하는 그 환자를 알아보았다. 뽑아도 계속 나기에 지금은 생긴 대로 살리라 작정하고 뽑기를 포기한 흰머리 중에 적어도 3개 이상은 책임지셔야 되는 아주머니였다. “오셨어요? 오랜만이시네요?” 반갑게 인사를 했지만, 나는 약간의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 아주머니를 만난 것은 10년 전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여장부같이 생긴 분이 진료실에 들어오자마자 내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일단 제 이야기부터 들어보세요. 저는 틀니를 하러 왔어요. 시장에서 장사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별로 없어요. 기다리지 않게 해 주세요. 그런데다가 신경도 예민하고 까다로워서 심장병, 위장병, 신경성 질환 등 없는 병이 없어요. 항상 몸이 여기저기가 아파요”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난 뒤에 검사를 해보았다. 아주머니의 말대로 건강 상태가 너무 안 좋았다. 그리고 잇몸 뼈가 너무 줄어 틀니를 해도 제대로 쓰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저는 자신이 없으니 대학병원으로 의뢰해 드리겠습니다.” “소문 듣고 왔으니, 선생님이 알아서 잘 해주세요. 그냥 밥만 먹게 해
급류 김용재(作) ’74 연세치대 졸업 청주 상아치과 2001년 ‘물’사진전 개최
가족의 행복이 없으면 자기자신의 행복도 없다 힘이 되어줄 것은 가족 밖에… 올해로 결혼 10년을 맞았다. 결혼초, 동기들에 비해 늦장가를 가서인지 애들만큼은 빨리 낳아야겠다는 생각에 참 열심히도 노력했다. 밤,낮(?)으로 노력한 결과 줄줄이 3명을 낳았다. 주변 어른들도 참 부러워했다. 그것도 아들, 딸, 아들이라니 .... 고만고만한 애들이 3명이니 키울 때는 참으로 힘이 들었다. 큰애가 아장아장 할때쯤 둘째가 나왔고, 둘째가 돐 지났을때 세째 배가 불러왔다. 가족 나들이라도 할라치면 세명의 아이들 짐을 싸다보면 출발하기도 전에 벌써 지친다. 기저귀에, 유모차에, 여벌옷에... 한짐씩 짊어지고 다녔다. 처음보는 사람은 “다들 댁의 애들이요?” 하고 물어보는 이들도 있었다. 속없는 나는 저만큼 앞서서 혼자 걸어갈 때도 있었다. 애 키우기가 힘들었지만 그 힘든 과정 중에 느끼는 행복감이란 무한한 것이었다. 지금은 큰애가 초등학교 3학년이어서 그런대로 다 키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물질적인 것보다 자식이 부모에게 주는 정신적인 것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한다. 자식은 부모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해준다. 즐거움과 행복을 가져다준다. 우리의
유혜경 作 90년 조선치대 졸 대전 성남치과 원장
최병호 /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구강악안면외과 교수 "록키" 음악에 맞춰 발걸음도 춤추듯이 보스톤마라톤코스는 초반에 내리막이고 그후 오르락내리락하여 힘이 드는 편이라고 합니다. 처음부터 내리막길이고 출발 때의 흥분으로 오버페이스하지 않아야지 하는 출발 전 생각은 출발과 동시에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뛰는 사람들의 행렬로 오히려 제자신의 속도보다 늦게 달려야 했습니다. 도로를 메우면서 흐르는 물줄기의 흐름은 약 15km 지점까지 가늘어지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달리는 도로 주변을 꽉 메운 시민들은 달리는 마라토너들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돌아온 군인들처럼 열열히 환영하였습니다. 어느 가정의 큰 스피커에서는 귀에 익은 팝송 ‘록키’가 크게 울려 퍼져 나왔습니다. 음악에 맞추어 춤추듯이 가볍게 달렸습니다. 양쪽에서 들리는 응원의 함성이 너무 커서 라디오라면 볼륨을 낮추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시민들은 깐 레몬조각을 건네주기 위해 손에 하나씩 들고 손을 길게 내밀고 있었습니다. 지난 조선일보 춘천마라톤대회 당일아침 식당에서 내장탕을 먹고 설사로 저장해둔 음식마저 몽땅 흘러 보내야 했던 경험 때문에 연습 때 먹어 보지 않
북한산의 성하(盛夏) 유태영(作) ’69 서울치대 졸업 2001 유태영 작품전(롯데갤러리) 유태영치과원장
2002년 보스톤마라톤 참가기 2년 반 전 43세의 나이에 저의 마라톤은 시작되었습니다. 아내가 자신이 출전하는 조선일보 춘천마라톤 10km 코스에 함께 신청해 놓고 심심하니 함께 뛰어 달라고 졸랐습니다. 이때 참가한 10km 코스는 저에게 마라톤에 대한 관심과 새로운 도전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바로 1년 후인 2001. 10. 21. 조선일보 춘천마라톤이 저의 첫 번째 마라톤 풀코스의 도전이었습니다. 1년 동안 원주 종합경기장에서 일과 후 나름대로 준비하여 참가하였으나 무척이나 힘들게 뛰었던 기억이 납니다. 춘천댐을 지나 35km 지점부터 에너지가 소진되어 결승지점에서는 얼굴이 하얀 백지장이 되어 시체처럼 들어왔습니다. 결승선에서 만난 아내는 두려움을 억지로 참으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며 쳐다보고만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버스의자에서도 메스꺼움과 현기증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춘천마라톤대회에서 기적적으로 3시간 22분 05초의 기록을 내면서 보스톤마라톤 참가자격을 따내었습니다. 보스톤마라톤 대회는 연령별, 성별 참가자격 기록을 정해 놓고 공식국제대회에서 이 보다 빠른 기록을 보유한 자에게만 대회참가자격을 주기 때문에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