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문제 거시적·미시적 두 모순 존재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은 거시적인 모순과 일상적이고 미시적인 모순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존재합니다. 전자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시스템과 방향을 결정하고, 후자는 일상적으로 우리 생활에 그러한 모순을 투영합니다. 물론 이 두 가지 측면을 명확하게 나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으나, 또 그 두 가지 측면을 혼동한다면 아무 것도 해결이 되지 않겠죠. 의약분업과 관련된 일련의 많은 일들과 말들, 특히 인터넷에서 익명성을 무기로 원색적으로 부딪히는 입장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은 숨겨져 있거나 너무 거대해서 잘 보이지 않는 거시적 문제보다는 자신의 터미널을 통해 보이는 미시적 문제에 반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제 소견으로는 개원의들의 폐업과 전공의의 파업은 여타 직능단체들의 시위나 임금노동자들의 파업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없습니다. 어떤 것이든 단편적으로 보면 이익과 밥그릇 싸움 같지만, 그 배경에는 항상 더 근본적인 시스템의 문제가 깔려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한 이런 협상은 비도덕적이며 애초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는 말도 한편으로는 맞지만,
아침에 출근해 보니 치료의자가 밤새도록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반가웠습니다.
나는 무엇을 향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멀리까지 넓게 바라볼 수 있기를 소망 호텔 창밖으로 올려다 보이는 LA의 밤하늘은 우리집 베란다에서 보이는 야경과 사뭇 다릅니다. 흐릿해 보이는 검푸른 밤하늘, 어두운 바탕위에 별빛보다 많은 비행기 불빛이 여기 저기서 반짝이며 떠다닙니다. 도심 일부를 제외하고는 하늘높이 솟은 고층빌딩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제 며칠이 지나면 돌아가서 당신을 만날 수 있겠지요 . 함께 있을 때보다 더욱 커 보이는 당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3주 가까운 시간을 미국이라는 낯선 곳에서 지내다 돌아가면 어떤 얘기를 가장 먼저 꺼내게 될까요? 애리조나주 tucson에서 보낸 2주동안은 쉽게 좁혀지지 않은 시차로 졸음과 현기증이 함께 했습니다. 처음 며칠간의 낯설음과 위축된 소심함으로 예민하던 마음이 조금씩 무뎌가기시작 했습니다. 호텔이나 쇼핑몰 레스토랑 등에서 사람을 만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과정에 대한 부담감이 줄어가면서 식사량이 늘어났습니다. 문화적인 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한다는 것이, 그곳에서 오랜시간 머문다는 것으로 충분하진 않겠지만, 3주가 조금 모자라는 시간동안 내가 느낄 수 있는 극히 제한된 일부분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
“진보적 활동으로 더불어 사는 지식인으로 거듭나야 다가올 문제를 국민들과 함께 풀 밑거름 될 것” 8·15광복절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감격스런 소식과 「병·의원 폐업」 이라는 서글픈 뉴스를 동시에 보면서 민망함과 착찹함, 두려움이 동시에 교차됩니다. 「의·약분업」 이라는 대의 명분은 아무도 평가절하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약분업」 이라는 훌륭한 사회 보장 제도의 중심 키는 재원조달 이라는 것 또한 모두다 알고 있습니다. 결국 재원 조달 방법이 문제인데 만약 당장 통일이 되어서 국방비가 현저하게 줄어들지 않는 한 혁명보다 더 어렵다는 세법개정을 포함한 조세개혁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의 비극은 선진적 사회보장제도는 만들어 내고 싶으나 조세 개혁까지는 밀고 나갈 배짱이 없는 현 정부의 한계로 인해 발생했다고 생각됩니다. 이유야 어떻든 현재 의사들에게 쏟아지는 국민들의 비난은 그들 스스로 자초한 측면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무리 대외적으로 설명을 하여도 「이젠 개나 소나 다 파업하네!」 하며 이기적인 보수 집단으로 매도당하는 것을 보면서 실제적인 강력한 파워는 있으면서도(공권력도 어쩌지 못하는) 그에 걸 맞는
마음 한 구석 아련한 추억을 나누는 場 인간 대 인간의 만남 이뤄지는 덴타폰 머리를 염색한 n 세대와 중년의 치과의사. 도저히 공통점을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양자간에 존재하는 세월의 간격이 무의미해 지는 곳이 있다. 바로 부산대학교 치과대학 락음악 동아리 (그룹사운드) Dentaphone 이다. 덴타폰은 지금으로부터 20년전에 만들어진 오로지 치과의사의, 치과의사에 의한 락음악 동아리이다. 인터넷과 멀티미디어속에서 물질적 풍요를 느끼며 성장한 대학 새내기부터 이제는 각 지역사회 내에서 굳건히 자리를 잡은 치과 원장님까지, 락음악이라는 하나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깊은 인간관계를 형성해 나가고 있는 동아리가 바로 덴타폰이다. 덴타폰은 매학년 한 기수라는 원칙하에 예과 1학년 치의예과 학생(통상 80명) 중 "끼있는" 친구들을 선발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이어나가고 있다. 80명 밖에 안되는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6~7명이 하나의 팀을 이뤄 예과 기간 동안 4회 이상의 정규공연을 한번도 끊임없이 20여년째 해온 것을 보면, “치과의사는 좀 분방한 기질이 있다”는 말이 그리 크게 틀리지는 않는것도 같다. 20년이라는 세월의 무게가 말해주듯, 그간
이제부턴 내가 하고픈 일 하며 살고 싶다 내 인생은 스스로의 적극적인 선택이므로 타향에서의 10여년의 생활을 정리하고 1994년 2월 고향으로 돌아온 나는 그토록 바라던 내 인생에서의 처음있는 자유를 즐기고 싶었다. 여행도 하고, 하고 싶었던 일도 하며…. 그러나 석달이 지나면서 허무하고 우울한 느낌이 내게 찾아왔고 역시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서둘러 그해 11월에 병원을 개원하게 되었다. 과연 잘 될까 하는 불안감 속에 개원을 했지만 다행히 처음부터 병원은 그런대로 잘 되었다. 갑자기 챙길 것도 많았고 스트레스도 받으면서 한 2, 3년간은 병원일 외엔 아무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개원 3년째인 1997년에는 책상에 앉을 시간도 없이 계속 환자를 보았으며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저녁엔 가끔 술을 마시게 되고 집에 가면 녹초가 되어 잠이 들었다가 다시 아침엔 허겁지겁 일어나 병원으로 가곤 하는 기계적인 삶이 반복되었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병원은 자리잡혀 갔고 병원에서 받는 스트레스도 줄었으며 모든게 안정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가끔씩 들곤 했으나 그게 무엇인지는 알수가 없었다. 그러다 1997년 말 I
내가 생각하던 진실·방황·희망을 적고 싶다 내 삶이 보편타당한 일상임을 얘기하고 싶다 “나는 18살이다. 나는 000이다. 나는 1만8천원이다.” 한동안 유행했던 CF속의 독백이다. 어느 가수가 흉내내듯 나도 나직이 내뱉어 본다. “나는 서른 둘이다. 나는 386이다. 나는 삼만이천원이다!” 참 알 수 없는 게 인생인 것 같다. 십대 때는 한창 인기있던 배우를 좋아해서 브로마이드다 사진첩이다 용돈을 쪼개 사 모았다. 이십대 때는 사정상(?) 별로 즐기고 노는 것 없이 그냥 떠 밀리듯 학교 졸업하고, 이십대 후반에 가서야 세상에 내던져진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어린시절, 학창시절이 그리웠지만 아무도 돌보지 않는 허허벌판의 소나무처럼 그렇게 곧고 푸르게만 서 있고 싶었다. 이제 나는 삼십대 초반, 옛날 같으면 인생 60의 반을 살았으니 시부모에 자식에 인생사에 궁금한 나인데 아직도 어린애 같다는 소리도 가끔 듣는 철부지 노처녀인 모양이다. 한동안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무얼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치과의사라는 직업말고는 글을 쓰고 싶었다. 중·고등학교 때도 영어, 수학 점수보다는 국어 점수가 나았고 굳이 국어라는 과목보다는 책 읽고, 책방에 가서 책 고르
영어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쏟은 시간과 노력 문법·토플·회화 3일만 열심히, 도로아미타불 영어공부에 쏟아부은 노력과 시간, 돈을 생각하면 안타까울 지경이다. 내가 영어를 처음 접한 중학교 때는 영어공부를 어떻게 했는지 조차 기억이 안 난다. 기억나는 것은 ABC 철자를 거짓말 좀 보태서 1천번쯤 쓴 기억 뿐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그 놈의 문법공부한다고 성문기본 보고 나서 종합인지 뭔지 좀더 단계가 높은 책을 본다고 날밤을 새우고 단어 몇 개 더 많이 외운 것을 자랑하고 다녔다. 그러나 영어 듣기 평가는 그 때부터 생겨 가지고 맨날 바닥을 기어 다녔다. 영어로 듣기만 하면 왜 그리 딴 생각이 나는지 그 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대학에 들어와 영어실력은 더 줄어 들었다. 그나마 알고 있던 단어들마저 다 잊어버려 전공 단어 말고는 사전을 계속 찾아야 하는 수준이 되었으며 사전을 찾다가 그 단어에 줄이 그어져 있으면 고등학교 때 공부 많이 했구나 하는 반가움도 잠시 돌아서면 잊어 버린다. 그러나 다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하는 생각에 방학 때는 토플 특강에 영어단어 1천 단어 정복이라는 거창한 목표아래 3일은 열심히, 정말로 열심히 다녔다. 그리고 끝이
작은 것들에 눈을 빼앗기며 걷는 출근길 아침마다 나에게 일상의 소중함 일깨워 진주라는 작은 도시에서 사는 나에게 누군가가 작은 도시에서 사는 즐거움을 하나만 들어보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걸어서 출퇴근하는 재미라고 말하겠다. 나의 병원은 도심의 제일 중심에 있는데도 집에서 출발해서 빨리 걸으면 15분쯤 걸리고 주변에 시선을 주며 느긋하게 걸으면 20분쯤 걸린다. 대개는 주변에 시선을 주며 생각에 잠겨 걷기 때문에 20분쯤 걸리는 것이 보통이다. 나는 가능한한 차가 잘 다니지 않는 골목길로 주로 다닌다. 우선 집을 나서서 첫번째 골목에 접어들면 벌써 눈길이 잡히는 곳이 있다. 뜰에 심어 놓은 목련이 유난히도 예쁜 집이 있는데 이른 봄철이면 상아색 처연한 봉오리를 푸른 하늘에 기도하듯이 피워올린 모습에 끌려 그 밑에서 잠깐이라도 걸음을 멈추고 황홀한 눈길을 던지곤 한다. 봄바람에 날리는 목련꽃의 향기가 사그라드는 골목 끝을 지나 1분쯤 더가면 성당의 뒷길이 나오는데, 이 골목길에서도 항상 시선을 빼앗기는 곳이 있다. 성당의 지붕 꼭대기에는 참새들이 항상 일렬로 늘어앉아 수다를 떨곤 한다. 특히 겨울에는 이른 아침 햇살에 간밤의 추위를 녹이느라 부산히 날개
스케이팅 보조운동으로 시작한 싸이클링 환경 살리고 자연 벗삼아 달리니 너무 좋아 모든 운동마다 쓰이는 근육이 달라 스케이팅의 보조운동으로 싸이클링을 한다. 그래서 우리 클럽은 주말에는 회원들이 함께 싸이클을 탄다. 싸이클 이 또한 얼마나 폼을 요구하는 운동인가. 가볍고 좋은 싸이클은 가격이 만만치 않다. 마침 선배님께서 치과에 오셔서 보철 치료를 하시며 싸이클 구입을 권하셔서 그 치료비 없는 셈치고 눈 딱감고 구입을 해 지금도 선배님은 『허원장, 그 싸이클은 내가 사준거나 마찬가지야』 하신다. 이것도 처음이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 자전거를 막 타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허리는 잔뜩 굽히고 목은 바짝 쳐들고 타다보니 목, 허리, 팔까지 저려왔다. 타이어가 가늘어 정확한 패달링과 주법이 요구되었다. 국가대표 선수들의 벨로트롬 경기나 도로 싸이클링 시합은 얼마나 화려하고 폼이 멋진가 말이다. 모든 운동은 폼이 정확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그래서 실력과 함께 장비와 복장도 제대로 갖추어져야 그 멋이 더해지는 것이다. 헬멧, 고글, 장갑, 싸이클 신발, 복장 등 갖출 것도 많았다. 처음엔 장비구입에 경비가 좀 들어가지만 한번 장만하면 평생 쓸 수 있으니
선배 권유로 시작한 새벽 운동 쇼트트랙 아무도 없는 링크서 홀로 탈 때 쾌감 만끽 새벽5시 알람소리에 잠이 깬다. 벌떡 일어나 스케이트를 챙기고 트리코복장(스케이트 선수들이 입는 쫄쫄이(?)바지)를 갖춘다. 이제 칠순이신 어머니는 수영채비를 하시고 함께 연수동에 있는 동남 스포피아로 향한다. 집에선 좀 떨어져 있지만 새벽 운동의 상큼함이 이른 시간 나를 흔들어 놓는 것이다. 약 2시간 쇼트트랙 스케이트를 타고 오는 것이 나의 하루를 여는 아침 운동이 된 것이다. 이 운동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IMF이후 모두 어려울 때 우리 치과의사들이 흔히 하는 운동인 골프가 은근히 미운 눈총을 받고 캐디백을 둘러메고 나가는 일이 이웃의 눈치가 보였고, 주중 골프로 아침에 나가 점심이 지나 병원에 돌아오는 것도 환자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다른 좋은 운동이 없을까 하던 차에 마침 내가 나가는 로타리 클럽의 고교 선배인 김원익형(부친이 런던올림픽에 출전한 김석영씨로 한국 레슬링계의 대부이며 대대로 인천 스포츠계의 발전에 앞장서 온)이 스케이트와 싸이클도 유산소 운동이니 함께 해 보자고 권하셔서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장난이 아니었다. 60년대 어린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