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대 문호에 셰익스피어, 톨스토이와 위고(Victor Hugo)를 꼽는다면 별 이론이 없을 것이다. 20세기 후반부터 대세로 굳어진 뮤지컬 장르에서는, 4대 뮤지컬의 하나인 ‘레미제라블’과 ‘노트르담 드 파리’등 위고가 압도적인 우위에 있다. 망명생활 중 60세에 출판한 소설 레미제라블은 두 세대가 넘는 세월에 방대한 철학과 사회비판을 담고 있어, 영화나 뮤지컬로 제작하기가 어렵다. 이에 비하여 한참 떠오르는 젊은 예술인들의 리더이던 29세 청년 위고의 노트르담은, 보다 열정적이며 드라마틱하다. 거리에서 춤추는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가 아무런 죄도 없이 죽음을 당하고, 성당의 종치기 곱추 콰지모도가 따라 죽는다는 사회 최하층민의 ‘숙명’에 얽힌 비극이다. 그러나 위고의 집필 의도는 당시 파리시민들이 유서 깊은 고딕 건축물들을 마구 훼손하고 현대적인(?) 재건축에 몰두하던 부박(浮薄)한 풍조에 경종을 울려, 전통문화를 지키려는 데 있었다고 한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소설이지만, 15세기 “대성당의 시대”와 “지리학적 발견” 같은 인류문화의 대 변혁기에 대한 통찰 등, 박식한 전인(全人)적 천재가 시민을 가르친다는 계몽적인 자세가 엿보이고, 이는 훗날 레미제
우리와 닮은 이집트, 아비도스를 향해 가는길…“아쌀라무 알레이쿰!”… 2011년 이집트 혁명이 있기 전, 카이로대학 그랜드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이슬람과 서방의 화해를 강조하는 역사적 연설에 앞서 ‘앗살람 알레이쿰’ 하고 인사하자 3000여명의 청중은 환호와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아랍어로 ‘안녕하십니까?’ 정도의 보통 인사말이다. 누군가 인사해온다면 그냥 똑같이 ‘알레이쿰 살람’ 하면 된다. 본래 뜻은 “신의 평화가 당신에게”이고 화답은 “당신에게도 평화가” 이다. 사실 무슬림들 간에 사용하는 인사라고 하지만, 어느나라나 그렇듯… 여행자가 현지어로 인사하는 것에는 대게 환한 미소가 따르기 마련, 당신 무슬림이냐고 따져 묻거나 난 기독교인이라고 정색하지 않는다. 이제 이집트 여행이야기를 하려하지만… 앞서 이것은 얘기하고 싶다. 서방식 사고와 세계관에 익숙한 우리는 이슬람에 대해 대체로 무지하며, 때로 무례하기까지 한 것이 사실이다. 종교나 정치가 아닌 문화와 풍속,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우리의 개고기 문화에 서양 사람들이 어떤 편견을 가져왔는지를 생각한다면… 그의 몇 배 몇 십배 정도의 무지라고 해두고 싶다.여행이야기에 굳이 이 이야기를 보
요즘 좀 번화한 동네다 싶으면 90년대의 노래들이 길가에 넘쳐난다.‘난~ 너를 믿었던 만큼 내~친구도 믿었기에~~ ♬♩♩~~♪~~’얼마 전 모 프로그램에서 90년대를 회상하며 유행했던 노래의 가수들과 함께 콘서트 비슷한 것을 했던지라….잘 알지도 못하던 요즘 세대들도 90년대의 음악에 흠뻑 취해들 있다. 나도 대세에 따라 차에서 항상 듣고 다니는 음악을 모조~리 90년대 음악으로?음, 좋은데? 꼭 90년대 나이트클럽에 있는 기분이랄까?기분이 좋으니까 흥에 겨워 먼 길도 신나는 노래 흥얼거리며 슝? 지루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다닐 수 있어서 너무 좋은 것 같다. 꼭 어릴 적 그 때 같다. 그런데, 머릿속은 90년대를 달리고 있는데, 몸은 90년대를 달리기엔 너무 많이 와 있는 듯.이미 마흔을 넘은 나이에 날로 불어가는 살들과 점점 떨어지는 체력까지, 에구구.‘나 돌아갈래~~~~~~~’한때 신촌과 이대, 홍대 일대를 주름잡던 몸이었는데 어느덧...“홍대에서 보자~~”친구들과 약속을 잡아도…. “뭔 홍대~~ 거기 갔다가 애들한테 치인다~~”에구구, 왜 이렇게 된 건지.친구들은 어릴 적 그립다며 클럽에 가자, 한번 찐~하게 뭉치자는 둥 얘기들을 하지만 고리타분하
한밤중이나 새벽녘에 휴대폰 문자가 오면 불안합니다. 십중팔구는 부고 알림이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에는 부모상을 주로 알려주더니, 요즘 들어서는 본인 상도 심심치 않게 보입니다.낮에 오는 문자 중에서는 친구들 자식 결혼식 청첩도 이제 자주 보입니다. 원치는 않았지만, 아버지 세대는 물러가고 우리들의 세대가 왔습니다. 아버지와 함께한 추억 중에서는 유쾌한 기억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자상한 아버지이기 보다는 엄한 아버지 상이 요구되던, 그리고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에 우리는 스스로 컸어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귀가하시기 전까지는 잠이 들어서도 안 되고, 아버지가 숟가락을 드시기 전까지는 식사를 해서는 안 되는 불문율 속에서 아버지는 가장 든든하고 존경하는 대상이었습니다.아이 셋을 키우면서 여행도 같이 다니고 맛있는 것도 먹고 학원도 데려다 주며 친한 척했지만, 이제 다 성장한 아이들은 퇴근한 나를 보고 데면데면 대합니다.내가 식탁에 앉기도 전에 먼저 식사를 하고 바쁘다며 일어섭니다. 긴한 일로 문자를 보냈지만, 수신확인만 하고 답장은 없습니다. 세월이 더 흐른 뒤 아이들에게 저는 어떤 아빠로 기억될까요?족보를 펼쳐봅니다. 족보에는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보입니다.
바다거북은 바닷가에서 일정간격 떨어진 백사장에 구덩이를 파고 알을 낳아 백사장의 지열로 알을 부화시킨다. 알에서 부화된 아기거북이는 바닷물과 가장 거리가 가까워지는 만조 시간에 알에서 부화되어 바닷물을 향하여 사력을 다하여 돌진한다. 거북이로써는 일생 가장 빠른 달리기며, 단 한번 밖에 없는 달리기다. 이 순간이 포식자 갈매기들에게는 성찬의 시간이다. 갈매기의 날카로운 먹이 공격을 피해 달리는, 건강하고 우수한 아기거북이만 살아 남고, 대부분인 나머지는 갈매기 밥이 된다. 그리고 일단 바닷물에 들어가면 그곳에서도 자기의 유전인자를 물려줄 어른거북이 될 때까지, 끊임없는 생존경쟁을 하여야 살아 남을 수 있다. 바다거북 뿐 아니다. 명태 한 마리가 낳은 80000개의 명태 알이 수정되어 부화되어도 거북이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부화 직후 다른 고기의 밥이 된다. 적자생존(適者生存-적합한 자만이 생존하는)의 이 자연계에서 거북이나 명태 경우처럼 약한 개체는 성장과정에서 먹이 사슬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강자의 밥이 되어 자신의 유전인자를 후손에 남길 수 없다. 생물의 진화는 이와같이 먹이사슬을 통과한 강자들만의 생존과 번식으로 수억년 간, 대를 거듭하여 선별 유전되어
침실 커튼을 접으면 백악산이 보인다. 왼쪽으로는 자하문 가까이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보현봉도 보일 정도였다.빌딩이 들어서면서 시야가 좁아져 청와대와 백악산만 보인다.풍설(風雪)이 가고 화창하다가 녹음이 짙어지는 백악산은 소년시절부터 오르고 싶던 산이다. 백악산 자락인 삼청동과 청운동에서 살던 때도 막혀서 오르지 못했던 산이다.청명(淸明)한 가을 날 2014년 9월 20년, 드디어 백악에 올랐다.백악산 접근 시작토요일 오전수업이 끝나면 왜 그렇게 좋았는지.중학교 1955~1957때, 반 친구들과 혜화동 교정을 나와 창경궁 - 원남동궁남동으로 바꿔야. - 비원 앞 - 안국동 - 광화문 - 경복궁 영추문 - 효자동 전차종점당시는 원효로 - 서울역 - 광화문 - 효자동, 현 청와대 입구까지 지상 전차가 다녔다 - 경무대옆현 청와대 - 자하문 - 세검정 골짜기까지 원정하였다. 우리들은 집이 전부 돈암동과 안암동이어서 세검정 골짜기까지 내려가는 일은 드물었다. 왜냐하면 귀가하는 길이 더 멀어지기 때문이다.우리는 전차표나 버스표 살돈으로 능금과 자두를 먹으러 자하문으로 갔다. 자하문 고개에 막 올라 오른 쪽으로 조금만 가면 자연스러운 비탈에 과수원이 전개되었다.능금과 자두
지난 11월 초, 휴대폰 판매 대리점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새벽부터 길게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른바 ‘아이폰 6 대란’, ‘아식스 대란’ 이다. 이는 단통법(이동통신단말장치 유통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 이하 단통법) 시행 1달여 만에 통신사 대리 업체들이 ‘보조금’이 아닌 ‘페이백’이라는 일종의 편법을 이용한 아이폰 6의 저가 공급 때문이었는데, 결국 방송통신위원회가 개입하였고 계약자들의 계약이 취소되는 촌극으로 마무리 되었다. 이런 웃지못할 해프닝은 바로 말 많고 탈 많은 ‘단통법’ 때문인데, 정부가 가지는 진의 파악은 음모론의 범주일 수 있으므로 차치하더라도 이 법령의 시행에는 유통구조의 개선이 표면적 주목적이 되고 있음은 분명히 파악된다. 바로 할인율이 중구난방인 상황에서 정가 - 정당한 가격일지, 정직한 가격일지, 정말 그 가격이 맞아? 인지 그 의미가 불분명한 - 에 대한 욕구, 나 혼자만 ‘호갱’(호구고객)이 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찝찝함이 반영된 법률이 아닐까 한다.최근 인상된 담뱃값처럼 정부에서 올리면 올리는 데로 이의제기를 하지도 못하는 정가 - 이때의 정가는 정해주는 대로의 가격이 아닐까 - 가 있는 반면 대부분의 상품 가격은
아이들은 학교에 가서 배웁니다.검정 사인펜으로.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방법을매일같이 채널을 켜면, 오늘의 비극이 들려온다.그것은 누군가 ‘죽었거나’, 혹은 누가 ‘살았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오늘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폭탄테러로 4명이 숨지고…”에서짧게 채널을 돌리고“그런데 박명수 씨는 무슨생각으로 치킨집을 차렸던…”에서폭소한다.-75세 할머니. 자택에서 숨진 채 4일 만에 발견- 이라는 뉴스에서손가락을 돌려 다른 창을 넘기고-여배우 A양. 시상식에서 섹시미 화끈- 이라는 뉴스에서손가락을 눌러 클릭한다.언제나 새로운 채널. 새로운 창으로 마우스의 한 클릭과, 스마트 폰의 한 손짓으로 변하는 세상.그 짧은 순간에비극이 희극이 되고희극은 비극이 된다.그리고 사람들은 더 이상 무엇이 비극인지 눈치 채지 못한다.서민들이 불을 지르고, 함성을 지르고 울음을 터트리는 동안오직 경찰들만이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때,배우들은 오직 멋쩍은 웃음과, 드레스와, 스크린쿼터로온갖 카메라와 함성을 지켜볼 수 있게 된다.이런 속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무엇이 비극이며, 무엇이 희극인지 모르게 되어버렸다.한 클릭과 손짓으로 변화하는 세상과, 그 사람들 속에서아이들은 더 이상극이 비극인
늘 저만치 성큼성큼 앞서가는 바람에 종종걸음으로 부지런히 따라가지 않으면 뒤를 놓치고는 했다. 따라가려고 따라가려고 해도 어린 걸음으로는 좇아갈 수가 없어, 반쯤 울상이 되어 그 등만 좇았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아빠는 뒤를 돌아보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두 무리였다. 앞서가는 아빠와 좇아가는 엄마와 언니와 나.그러던 것이 나이가 들고 내 키가 아빠만큼이나 커졌을 때, 나는 비로소 아빠 옆에서 나란히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래도 남자 보폭인지라, 여전히 내 발은 바쁘게 움직여야 했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등만 바라보며 뒤따르는 일은 없었다.옆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서 바라본 길은, 아니 아빠의 세계는 뒤따르며 보았던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가장 즐거웠던 것은 엄마도 언니도 보지 못한 새로운 길, 새로 생긴 가게며, 새로 피어난 꽃들을 가장 먼저 보고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럴때면 들떠서 재잘거리기에 바빴고, 때로는 뒤따라오는 엄마에게 달려가 앞에 어떤 새로운 가게가 생겼는지, 얼마나 화사한 꽃들이 피어있는지 얘기 해주고는 했다.물론, 난감한 상황에 처하는 적도 있었다. 두 갈래길, 세 갈래길, 또는 모르는 길이 나올 때면 엄
스웨덴 칼란데르스카 병원 수술실에서 페르 잉그바르 브로네마르크 교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저는 신을 보는 듯 했습니다. 저는 숨이 막히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수술 장면을 보고 저술하신 ‘Tissue integrated prostheses’ 책을 읽으면서 성경책을 보는 듯 했습니다. 무치악 임플란트 특수 시술법을 배우려고 1972년부터 1985년까지 13년간 세계를 돌아 다녔어도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Osseointegrated implant 시술법과 보철과정은 저에게는 예수님의 기적과 같이 보였습니다.1970년까지만 해도 모든 학자들은 이물질의 생체 골유착을 부정하던 시기였습니다. 스스로 implantologist라고 하던 치과의사들은 자연치아의 인대 역할을 할 수 있는 섬유유착의 이론을 주장하던 시기였습니다. 교수님이 아니었으면 아직도 우리는 섬유조직 유착의 미로를 헤매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수님은 당대의 실상을 뛰어넘는 임상적 성공의 세계를 여셨습니다. 주의 깊은 수술방식으로 titanium이 뼈에 붙는 내용을 관측해낸 결과는 치의학의 기초 임상 모든 부분에 혁명을 일으키셨습니다.1985년 북한치과의사들이 찾아와 교육을 받고 남한보다
‘요즘 치과의사하기가 힘들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심각한 경쟁 속에서 도덕심과 자존심의 추락도 감수하는 치과의사가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듣고 있자면 우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현실 앞에 나는 어떤 치과의사가 되어야 할까 자주 고민하게 됩니다.’ 지난 겨울 치의신보 지면을 통해 보았던 수련과정에 있는 선생님의 글입니다. 이 글은 저 또한 어떻게 살 것인가? 또 어떤 치과의사가 되어야 할 것인가?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어쩌다가 시작한 주제넘은 강의를 할 때마다 고민하는 치과의사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드려야 할까 고민하며 한 해를 보냈습니다. 1990년에 치과의사 면허를 취득한 이후 수많은 선후배 동료 치과의사들이 글과 말을 통해 제게 해주었던 이야기들에 어느새 이십년을 넘게 해온 개원의 경험에서 정리된 생각들을 조금 더하여 고민하는 후배님들에게 전해드려 보고자 애를 썼습니다. 지나온 한 해를 뒤돌아보며 제가 해온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인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앞으로 할 이야기는 또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청주시치과의사회 송년회 인사말에서 ‘앞으로 경기가 좋아질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할 일은 그저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