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국치대 관현악단 덴타모닉스가 지난 8월 30일(토) 서울 압구정동 장천아트홀에서 제31회 정기연주회를 가졌습니다. 저희 덴타모닉스는 학생들로 구성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입니다. 취미로 악기를 배워온 학생들이 대학교에 입학하고 오케스트라에 입단하거나, 오케스트라에 입단을 하고 악기를 처음 시작하는 대학생들로 이루어진 동아리가 1984년 첫 연주회를 시작으로 매년 가을 정기 연주회를 준비해오던 것이 어느덧 서른 한번째 공연을 치렀고, 150여명의 졸업생 선배님들 그리고 60여명의 재학생이 활동하고 있습니다.90세 할아버지가 5살짜리 어린아이 손을 잡고 같이 들으러 갈 수 있는 공연이 바로 오케스트라가 아닐까요? 다른 장르의 음악들도 좋지만 전 세대를 아우르며 즐길 수 있는 음악이라는 점에서 특히 관현악은 매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할아버지와 손자가, 아버지와 딸이 함께 공연을 설 수 있다면 얼마나 가슴 따뜻한 기회일까요?그것이 저희 오케스트라의 자랑이자 매력인 것 같습니다. 저희 동아리에서는 학교 재학생들이 주로 공연에 참여하지만 졸업하신 후에 학자가 되신, 치과의사가 되신 선배님들께서도 공연에서 함께 연주하십니다. 저희 동아리를 창단하신 81학번 선배
삼각산은 북한산의 핵심을 이루는 백운대(白雲臺, 836.5m), 인수봉(人壽峰, 810.5m), 만경대(萬鏡臺, 787.0m)가 큰 삼각형으로 놓여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삼각산 또는 삼봉산, 화산으로 불렸고 삼국시대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고 불렸다. 아기를 등에 업고 있는 형상을 닮았다고 지어진 이름이다. 고구려 동명왕의 왕자인 온조와 비류가 남쪽으로 내려와 한산(漢山, 서울의 옛 이름)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정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이 삼각산을 말한다. 그리고 조선의 수도 후보지를 찾으러 순례길에 나섰던 무학대사의 이야기에도 삼각산이 등장한다. 무학대사가 백운대로부터 맥을 밟아 만경대에 이르러 서남 방향으로 가 비봉에 이르니 “무학이 길을 잘못 들어 여기에 이른다”는 석비가 눈에 띄어 그 길로 방향을 바꾸어 내려가 오늘의 경복궁을 정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삼각산이다.삼각산이 예로부터 부르던 지명이고, 북한산이 일제 강점기에 지명개편을 하면서 사용된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북한산이라는 이름은 본디 서울의 옛 지명인 한산의 북쪽을 가리키는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의 고증으로 밝혀진 국보 문화재 ‘진흥
제갈공명은 교묘한 계략을 펼쳐 사마의가 이끄는 조예의 군사를 호로곡이라는 좁은 골짜기로 몰아넣는데 성공한다. 사마의의 호기심을 이용하여 말 모양의 수레를 만들어 그 위에 잘 타는 군량을 싣도록 유도하고 입에는 화약을 숨겨두었다. 그 말은 그리스 병사를 숨긴 트로이의 목마가 아니라 호로곡의 목마였던 셈이다. 건기였던 그 때, 천지는 메말라 있었고 공명은 화공을 이용하여 삼국이 마치 솥(鼎)의 세 발처럼 이루고 있던 균형을 마침내 깨뜨리려는 시점에 와 있었던 것이다. 호로곡 위쪽의 촉나라 매복 병사들은 깃털 부채의 신호에 맞추어 활과 노(弩)에 불을 붙여 계곡아래를 집중 공격하기 시작했다. 유인당해 호로곡에 갇힌 위나라 병사들은 출구가 없는 불지옥에서 비명을 지르며 몰살할 수밖에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 때 공명은 이겼다고 생각했으리라. 길고 지루한 살육의 악순환의 고리는 이 불바다 속에서 끊어지고 위나라의 멸망으로 솥의 한 발이 부러져 나가면서 한나라 유방의 피를 이어받은 임금을 중심으로 촉에 의해 대륙의 통일이 이루어지리라 생각했으리라.삼국지를 읽으면서 이 대목에서 항상 드는 의구심이 있다. 애초에 공명이 칩거하고 있던 시절에 유비를 삼고초려 시켰던 이유는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와 함성, 기립박수! 천 여석은 족히 되고도 남을 듯한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환호와 그칠줄 모르는 박수……. 작곡가 뮐러가 이곳에 머물면서 울창한 숲과 만년설의 고봉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풍광에 취해 불후의 명곡들을 작곡했음을 기념하기 위해 이름 지어졌다는 뮐러 기념홀에서 2014년 6월 27일 대한민국 전북치과의사회 남성합창단(무지카 덴탈레)의 아름다운 화음이 신나는 장구소리와 함께 리드미컬하게 울려 퍼집니다.아시아권에서는 한국팀이 유일하게 참가했으므로 관객 대부분이 유럽과 미국 등 서양인들이였고, 우리 합창단의 열창과 화음이 꽤나 높은 수준에 있다손 치더라도 동서양간의 문화 예술적 간극도 있을 테고 또 우리노래에 대한 느낌이나 감정의 공유가 쉽지 않을 것임을 예상했기에 큰 감동을 선물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더욱이 무지카 덴탈레의 출연 전 객석에서 공연을 지켜본 바 세계 각국에서 참가한 출연팀의 합창실력이 전문 성악가들로 구성된 팀이라 해도 믿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실력파 팀들이었기에 애당초 큰 박수를 생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30개국 60여 출전팀 중 어느 팀보다도 우리합창단이 받은 객석의 반응은 더욱 뜨거운 것이어서
며칠 전 고등학교와 대학시절에 쓴 일기장을 들여다보니 ‘힘내라고, 너는 해낼 수 있다‘며 자신을 응원해주고 격려해주던 나의 싱클레어를 만날 수 있어서 시나브로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아! 그 시절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 그런 일로 많이 힘들어 했었네…’학부모 일기를 써야한다는 얘길 얼핏 들었는데, 중학생인 딸아이가 오늘은 학부모 일기장이라며 아빠에게 건넨다. 그러고 보니 지난해에도 ‘나의 초등학교 4학년 그 어느 날’ 이란 제목으로 아들의 일기장에도 일기를 썼었는데, 딸아이의 학부모 일기도 아빠 몫이다. 딸에게 아빠가 일기를 다 써주면 문화상품권이라도 줄 거냐고 우스개 소리를 건네 본다.마냥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던 아빠의 중학교시절을 떠올릴 때면 두 분의 참 고마운 선생님이 떠오른다. 한 분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아빠를 늘 칭찬해주시고 인정해주시던 기술과목을 지도해주시는 선생님이셨다. 수업시간에 떠들거나 장난치는 아이들이 있으면 앞으로 불러내서 신고 계시던 슬리퍼를 벗어들고 친구들 뺨을 때리곤 하셔서 친구들 사이에서 원성이 자자했었는데, 그래도 내게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멋진 키팅 선생님처럼 좋은 선생님이셨다. 다른 한 분의 선생님은 잘
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DECA 동아리(회장 이찬주 2학년, 지도교수 김태우)가 (사)Dental Service International(회장 임구영 헵시바치과)과 연합으로 캄보디아 빈민지역에서 지난 7월 14일부터 일주일간 봉사를 다녀왔다. 지난 7월 14일(월) 저녁에 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DECA 동아리 회원들은 오랜 준비를 마치고, 연건캠퍼스 서울대학교 병원교회 앞에서 봉사에 필요한 장비와 짐들을 서울대학교 버스에 싣고 설레는 마음으로 출발을 하였다. 참가자들은 치의학대학원생 15명, 레지던트 2명, 치과원장님 2명, 위생사 2명, 일반인 5명 등 총 27명으로 모두들 자비를 들여서 참여한 자원자들이다. 현지에서는 치과의사 1명, 캄보디아 인터내셔널 치과대학 7학년 2명, 위생사 2명, 통역사 1명이 협력을 하였다. 프놈펜에 비행기가 연착해 7월 15일(화) 새벽 1시에 호텔에 도착을 하였다. 다음 날 새벽부터 서둘러서 세 대의 승합차로 나누어 타고 깜퐁짬주의 오스와이 마을로 향하였다. 대형 버스가 들어 갈 수 없는 좁고 위험한 길이 많아서 작은 차에 분산하여 짐을 싣고 승차를 하였다. 2시간 30분 정도 이동하여 도착한 이곳은 지난번에 오지 않았던
지난 8월 20일 저녁 8시에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세시간 반의 비행 끝에 몽골 울란바타르 칭기스칸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2년차 전공의인 필자는 대한치주과학회와 몽골치주학회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교육 워크숍에 참석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는 대한치주과학회가 최근 제정한 한수부 국제협력기금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그간 국내 병원에 연수 중인 몽골 치과의사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몽골에 대해 들어왔지만, 직접 몽골을 방문한다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였다. 서울대학교 치과병원 치주과에서 연수를 받은 오스카 선생과 바야르 선생이 맞이해준 울란바토르 시내는 다소 어둡고 낙후된 느낌이었지만, 곳곳에서 건설중인 고층빌딩의 모습에서 변화하는 몽골의 단면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2011년 시작하여 올해로 4회째를 맞는 이번 워크숍은 “치주조직재생수술 및 치주성형술”을 주제로 구성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연세대 최성호 교수님, 경희대 신승윤 교수님, 그리고 서울대에서 구 영 교수님과 필자가 참석하게 되었다. 그동안의 워크숍에서 다루었던 비외과적 및 외과적 치주치료, 임플란트에 이어 올해는 치주재생술과 심미분야의 내용으로까지 진전된 주제로 구성된 것을 보았을
지난 6월, 모임( 중국거주 위안부 할머니 생계비 지원 사업에 참여했던 선생님들 후속 모임)에 나갔다가 김 진 교수님 제안으로 스리랑카 치과진료봉사에 참여하기로 했다. 갑작스러운 결정으로 마음이 분주해졌다. 나는 서둘러 개발도상국·후진국. 불교국가, 쓰나미, 실론티의 나라 등 스리랑카 관련 인터넷 검색에 나섰다. 도대체 스리랑카와 구강병리학자는 무슨 인연이 있었던 걸까? 병리학자로서 구강암 연구를 하신 교수님을 통해 스리랑카가 구강암 발병률 세계 1위 국가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발병 원인이 베텔잎과 아레카넛을 향락으로 씹는 습관과 연관된다는 짧은 지식도 얻었다.출국이 임박했을 때 치과진료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임시치과의사면허증을 스리랑카 정부로부터 발급받아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임시면허증을 얻기 위해 치과대학 졸업증명서, 면허증 그리고 임상경력을 제출했다. 이번 해외진료봉사는 복잡한 서류 절차 때문에 더욱더 긴장되었다.진료 당일 새벽에 스리랑카에 도착한 진료팀과 그곳에서 개최된 국제 구강암학회에 참석했던 경기도 치위생사협회(경치위)소속 선생님들을 교수님이 진료 현장으로 안내했다. 우리들의 미션은 고산지역 차밭 노동자와 가족들의 간단한 구강검진
집 앞에 새로 도서관이 생겼다는 소식에 가보기로 했다. 눈에 띈 건 노란색 표지의 ‘Now is good’이라는 제목이었다. 원래 책을 빌리거나 살 때 책안을 살짝 들여다보고 결정하는 편인데 노란표지에 간단하고 작게 쓰여 있는 제목이 마음에 들어 골랐다.무슨 내용이든 잘 읽히기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첫 페이지를 열었다. 줄거리를 말하자면 암에 걸린 고등학생 소녀 ‘테사’가 시한부 인생을 살며 느끼는 삶에 대한 욕망과, 그 소녀를 둘러싼 가족, 친구, 남자친구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테사는 죽기 전 하고 싶은 일 리스트를 만들고, 무작정 실현 시켜보려 한다. 그녀는 두려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 중 어느 소설에나 등장하는 멋진 남자처럼 옆집의 애덤이 나타나 그녀의 수호천사가 되어준다. 그는 그녀가 살아있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그녀는 그와 함께하고 싶음에 죽음이 억울하고 두려워진다. 겉으로 드러나는 테사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대체로 담담하다. 그러나 속으로는 애덤이 나이 들어 자신의 옆에서 코고는 소리를 듣고 싶어하며, 미래에 학부모가 되어 자녀들이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것도 꿈꾼다. 그러나 죽음은 누구에게나 그렇듯 점점
“OO메디컬 빌딩, XX안과…” 어릴 적부터 간판을 읽고 다니는 버릇 덕에 전 아주 길눈이 밝습니다. 그 때문인지 작은 변화도 빨리 발견하고 사물을 깊게 바라보거나 혹은 비틀어보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변화가 즐겁고 그 것을 기록하는 걸 좋아하다보니 어느새 저는 예쁜미소바른이치과 경영지원본부 마케팅과 팀장이 되어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합니다. “너 치과에서 무슨 일 해?” 지인들에게 치과에 근무한다 말한 이후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부서명 그대로 치과경영을 지원하는 부서이다 보니 진료를 제외한 모든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간식도 사러가고 화장실 수건도 갈아야하고 병원의 크고 작은 행사의 사회를 보기도 합니다. 수많은 저의 업무 중 가장 즐거운 일이 있다면 바로 병원 내 사보를 만드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 작은 디자인 회사에서 어깨 넘어 배운 것이 바로 리플렛, 사보 등을 기획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을 되짚어 병원 내 잡지를 만들어 보겠다고 야심차게 말했던 신입 시절의 당돌함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다 생각될 정도로 병원의 현재를 기록하여 역사로 남기는 일은 저에게 에너지를 불어넣어주었습니다.
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에 입학한 직후 나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동아리의 선택이었다. 각자 고유한 역사를 가지고 나름의 매력을 지니고 있는 수많은 동아리 중에서 1~2개의 활동을 선택하여 대학원 4년, 혹은 남은 평생 동안 지속해 나가야 한다는 점은 나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재밌게도 마지막 선택의 순간 내가 구라봉사회에 가입하기로 마음 먹은 이유는 실로 간단했다. ‘힘든 일을 하는 동아리니 구성원 간 유대감이 강할 것이다.’ 거기에 더불어 어쩌면 의료봉사라는 활동을 통해 ‘의료인으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이런 기대감으로 나는 의욕을 갖고 동아리 생활을 시작했다.학기 중 선배들과 선생님들께서는 한결같이 입을 모아 ‘하계진료가 구라의 꽃이다’ 라는 말씀과 더불어 하계진료의 고생스러움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꼭 언급하셨다. 점점 나를 비롯한 동기들은 하계진료에 대해 자세히 알지도 못한 채 부담감만 쌓아가게 되었다. 마침내 하계진료기간이 다가왔고, 버스에 몸을 싣고 도착한 경상남도 하동군 영신마을에서의 첫 날은 진료지 세팅으로 부산히 지나갔다. 저녁 식사 후 회의 자리에서의 구라봉사회를 설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