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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치과의학회와 경성치과의학회

배광식 칼럼

대한의사협회의 시원은 의사연구회(醫事硏究會)이다. 1908년 일본인들이 계림의학회(鷄林醫學會)를 결성한데 맞서, 1908년 11월 15일 일본 유학 출신의 의학교 전직 교관과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의사연구회를 조직했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1910년 강압에 의해 해산되었다.


한국 최초의 치의학 학술단체는 1919년 10월 조선에 있는 일본인 치과의사들이 치의학의 연구 및 그 진보, 권익 그리고 친목을 위하여 만든 조선치과의학회(朝鮮齒科醫學會)이다. 이전에 치과의사들은 다른 의사들과 함께 조선의학회(朝鮮醫學會)에서 활동해 오다가 일정한 수의 치과의사들이 모이자 나기라 다쓰미(柳樂達見), 나라자끼 도오요오(楢崎東陽), 도내가와 세이지로오(利根川淸治郞), 오오자와 기세이(大澤義誠)가 발기인이 되어 치과의사들만의 학술단체인 조선치과의학회를 창립한 것이다. 창립 시 서울 회원 12명을 포함하여 전국에 30명 정도의 회원이 있었다. 1919년 10월 경성구락부에서 총독의 오찬을 대접받은 후 촬영한 창립 사진에는 23명의 얼굴이 보인다.


초대 회장은 총독부의원 치과에 근무하던 나기라 다쓰미가 되었고, 부회장 1명, 간사 3명, 평의원 5명, 지방위원 약간명 등으로 구성된 임원은 대부분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한국인 임원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1927년 접대계에 안종서(安鐘書), 연회계에 함석태(咸錫泰), 조동흠(趙東欽), 1928년 접대계에 안종서, 연회계에 함석태, 김연권(金然權),  1930년 지방위원 한동찬(韓東燦)이 참가했을 뿐이었다.


학회는 1920년 5월 제1회, 그 후 거의 매년 9월 또는 10월에 한 번씩 열려 1943년까지 21회 열렸고, 1923년 관동대지진,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으로 3회 걸렀다. 학회에서 발표한 한국인은, 제 3회 때 유창선(劉昌宣)의  「전신적 질환의 구강에 미치는 영향」이 최초로, 27명이며, 486개의 연제 중에서 약 15%인 75개를 발표하였다. 반태유(潘泰收)와 배진극(裵珍極)의 발표는 후에 박사학위 수여에 일조하는 논문이 되기도 했다. 일본의 치과의학회 18개중 4위를 차지할 정도로 비교적 운영이 잘 되는 학회에 속했다.


1930년 제10회 총회에서 이꾸다 싱호(生田信保)가 총회비 징수 문제로 나기라 다쓰미에게 반기를 들어, 나기라 다쓰미 회장은 신진인 사와 야마이(澤山居)를 추천하고 사임하였으나 회장에 미시나 케이키치(三品敬吉)가 당선되었다. 그 후 1932년 재12회 총회에서 이꾸다 싱호가 회장이 되었고, 이후 조선치과의학회의 주 구성원은 경성제국대학과 경성의학전문학교 치과의사 및 개업 치과의사들이었다.


조선치과의학회는 학회지『조선치과의학회잡지』를 1925년 6월 15일 창간했으며, 1926년 이후 매년 2-4회 발행해, 1939년 14권 3,4호까지 총38권이 발간되었다.


1930년 조선치과의학회 알력 발생 후, 1932년 10월 30일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배경으로 경성치과의학회가 설립되었는데,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교우회원 및 회의 목적에 찬성한 일반치과의사를 정회원으로,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학우회원을 준회원으로 조직되었다. 설립 시 회원이 약 400여명 정도였고, 회장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장 나기라 다쓰미가 맡았고, 기타 임원은 회장이 선임하였으며, 한국인은 1932년 평의원 안종서(安鍾書), 박명진(朴明鎭), 수원 이창용(李昌鎔), 평양 한종호(韓宗鎬) 등이 참석하였다. 그 후 대구 김유식(金裕植), 이유경(李有慶), 진주 김상문(金尙文), 만주 김기종(金旣鍾), 안전정호(安田正浩) 등도 참여하였으며, 1940년에는 朴明鎭이 서무간사, 鄭保羅가 회계간사를 맡기도 하였다.


학회에서 발표한 한국인은 16명이며 481개의 연제 중 약 11%인 52개를 발표하였다. 이 연제 가운데는 박명진(朴明鎭)의 박사학위 관련 논문 등이 있었다.


경성치과의학회와 조선치과의학회 간에 잦은 마찰이 있었는데, 이는 경성치과의학회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교우회 중심에서 탈피해, 일반치과의사들까지 회원의 범위를 넓혔기 때문이다. 나기라 다쓰미는 “학회의 임무는 학문을 진보 발달시켜야 함으로 누구든지 입회시킬 수 있고, 또한 회원은 강연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반대 입장은 경성치과의학회가 자교 위주로 활동해 공명정대하지 못할 수 있으므로 기존의 조선치과의학회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경성치과의학회의 경쟁적 활동 결과와 더불어 해마다 졸업생 배출로 회원이 증가되어 양적인 팽창을 가져왔으며 학회의 역량이 증강되었다. 경성치과의학회의 총회는 1937년 중일전쟁으로 중지된 이외에 설립부터 1943년까지 11번 열렸다.


경성치과의학회는 학회지『경성치과의학회잡지』를 1932년 12월 1일에 창간해 1년에 3-4회 발행하여 총 25권 발행하였다. 그 내용으로는 원저, 종설, 실험, 임상, 초록, 총회 예회보, 회원동정, 교우회기, 부록 등이 있고, 오카다 타다시(岡田正), 야오 타로(失尾太郞), 니시야마 유기오(西山幸男), 히로타 세이이찌(弘田精一), 카키미 요죠(垣見庸三), 호리 타께시(堀武), 박명진(朴明鎭)의 박사학위 주논문이 게재되었다.


경성치과의학회의 연사 중에는 쇼오후우 켄지(松風憲二) 사장과 미야츠 하지메(宮津一) 공장장이 매년 참석하여 치과재료에 관심을 표명하였다. 경성치과의학회 총회에는 반드시 쇼오후우 켄지가 참석해 강연을 하였다. 그리고 ‘1년 동안에 연구한 신제품의 완성이, 경성치과의학회 강연을 하는 때인 경성치과의학회 총회에 맞추어 진다’고 쇼오후우 켄지는 늘 나기라 다쓰미에게 말하곤 했다. 1934년 9월의 제3회 총회의 경우, 고토우(後藤)풍운당치과부, 만선치과상회를 비롯한 18개 치과재료상의 전시가 있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