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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인상, 아날로그 인생

Relay Essay 제2440번째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카오톡 등 다양한 치과 마케팅 홍보 채널들이 존재하지만 여전히 간판을 보고 내원해주시는 환자분들이 종종 계신다. 우리 치과에는 그 흔한 태블릿 PC 한 대 없다. 동의서는 모두 인쇄소에 맡겨 종이에 그려가며 설명하고 환자분께 펜을 건낸다. 펜 끝에서 나오는 잉크는 언제나 솔직하다.

 

‘자 이제 본을 뜰거에요. 움직이지 말고 4분 동안 악 물고 계셔야해요.’

 

기다림의 시작이다. 근관치료를 위한 여러번의 내원과 치아 프렙. 이번에 새로 산 bur가 잘 해줬겠지? 성적표를 받기 전의 기분. 환자도 나도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진료실에 조용히 울려 퍼진다.

 

‘쩍’

 

트레이에 흘러 내리는 환자의 침을 빠르게 돌려 닦는 직원의 손놀림은 늘 건조하다. 기대반, 걱정반으로 인상체를 면밀히 살피고 입을 헹굴 수 있게 체어를 올린다.

 

최첨단 디지털 시대이다. 다양한 방식의 구강 스캐너가 널리널리 보급되고 있다. 몇 천만원에 구강 스캐너와 CAD/CAM 밀링머신까지 패키지로 판매하는 영업사원들은 더 이상 나를 찾지 않는다. 환자가 입을 벌린채 그 위에 3D 프린터로 크라운을 직접 쌓아올린다 하더라도 교합오차는 발생할 수 밖에 없다는 개똥철학을 가진 나다. 최종 보철물을 손으로 직접 다듬고 수정하지 않는 치과의사는 없으니 말이다.

 

우리 치과에는 여러 ‘첨단’ 장비들이 존재한다. FOV 16 이상으로 얼굴 전체를 촬영할 수 있는 고성능의 3D CT에서 단 몇 초만에 레진 중합을 해내는 미국산 광중합기, 전동 토크드라이버, 최신의 엔도모터 등 많은 전자장비들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인상채득은 언제나 폴리비닐실록세인(Polyvinyl siloxane)이다. 물론 인상재의 변형, 기공 오차 등 몇몇 에러요인이 존재하지만 선학들이 부지런히 연구해주신 덕에 별 탈 없이 보철물을 딜리버리 하고 있다.

 

‘원장님, 인상재 다 떨어져 가는데 이번에 행사하는거 한번 써볼까요?’
‘음.. 그냥 쓰던거 쓰자.’

 

작은 원장실 한켠에는 학생 때부터 보던 교과서가 가득하다. 틈틈히 사모은 최신 지견의 임상서적도 간간히 고개를 내민다. 너도나도 이게 더 빠르고 정확하다며 다양한 술기가 쏟아지지만 언제나 고전이 명작이다.

 

매달 돈을 내어 빌려쓰는 커피머신은 오직 환자들의 것이다. 대기실 한쪽에 쌓여있는 믹스커피 한봉지를 꺼내어 따뜻한 물을 받아 원장실로 향한다. 믹스커피 봉지로 커피를 휘젓는 나에게 더럽다며 핀잔 주는 실장의 잔소리는 언제나 따뜻하다.

 

30대 후반인 나는 자전거 타기와 등산을 좋아한다. 학생 때도 겨울이면 장비를 바리바리 챙겨 지리산, 덕유산, 설악산 종주를 연달아 했다. 나의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시간. 자전거 타기 국토 종주 메달은 거짓말 좀 보태면 개수를 세기도 어렵다. 아름다운 우리강산 내 발로 모두 밟아보리.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도 맡고, 소리를 듣고 손으로 만져봐야 직성이 풀린다. 임플란트 식립할 때 가이드, 네비게이션을 사용하지 않는 나는 치의학 박사 / 구강악안면외과 전문의이다.

 

이제는 치과도 평가의 시대이다. 모든 환자들이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은 오늘도 나에게 점수를 매긴다. 낯설다.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 그 시절, 입소문이 치과의 리뷰였을 터. 그때가 객관적이었을지 지금이 합리적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인터넷 세상이다. 몫 좋은 자리 터줏대감도 슬슬 옛말이 되어가는 듯하다. 검색해서 바로 나오는 치과가 잘하는 치과가 되버렸다. 하긴 카페도 음식점도 모두 검색해서 리뷰 보고 가는 세상이니.

 

‘원장님, 우리도 리뷰 이벤트 해볼까요?’
‘음.. 그냥 두자.’

 

더 나이가 들어 세상이 더욱 두려워질 무렵에 지나온 내 삶의 본을 떠보고 싶다. 불쾌한 침도 묻어나겠지만 잘 다듬어진 삶이 인기되길 바란다. 지금 내 위치는 동의서를 받는 시점일까, 마취를 하고 있는 시점일까. 그것보다 앞서 치료계획을 세우고 있는 시점이라면, 병원의 이익과 술자의 편의성을 고려하거나 내원횟수를 줄이려는 노력은 없었으면 좋겠다. 느려도 황소걸음처럼, 오직 교과서적인 계획이었으면 싶다.

 

발치 후 4개월, 뼈이식 후 4개월, 임플란트 픽스처 식립 후 4개월의 계획에 고개를 끄덕이던 나이 지긋하신 환자분. 최신 컴퓨터도 익숙한 콘센트에 코드를 꽂아야 작동한다. 잘 요리된 퓨전 음식도 늘 쓰던 숟가락과 젓가락으로 먹는 법이니까.

 

인터넷도 빨라지고 세상이 참 많이 변해간다. 그런데 막상 주위를 둘러보면 10년, 20년 전과 큰 차이가 없는 것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