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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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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선배님의 소셜미디어에서 “일상이라는 공간에서 추상명사를 동사의 문장으로 바꾸어 가는 것”이라고 쓰신 글에 크게 동감하고 곱씹어봤습니다. 종교적인 이야기를 하신 것이었지만, 우리들의 삶에 적용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추상명사만 난무하면 이상적으로 보일 수는 있지만, 실제는 오히려 내용 없는 빈껍데기인 경우가 많습니다. 저 혼자만의 개똥철학으로 “아는 것 보다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 기분 좋은 사색을 이어갔습니다.

 

“명사가 아닌 동사”에 대해서 생각하던 중, 우리 말에는 없지만 영어에는 있는 “be 동사”가 생각났습니다. 직역하면 “이다”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 말에는 없기 때문에 “뭐뭐이다” 정도만으로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언어구조학적으로 본다면 일반 동사에 비해 움직임이 아니라 상태를 나타내준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에서 찾은 “be 동사”에 대한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인도유럽어족 계통에서, 동사 이외의 품사가 서술어가 되어야 할 경우, 명목상(형식적)으로 넣어 두는 동사를 뜻한다. 영어의 be가 가장 유명한 예시일 것이다. 이를 한국 내 교육과정에서는 흔히 Be 동사라고 가르치고 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한국어에서는 ‘이다’가 계사에 속한다.

 

영어가 그렇듯,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다른 언어를 배울 때도 모든 동사들 중 가장 먼저 배우게 된다. 프랑스어의 etre 동사, 스페인어의 ser 동사와 estar 동사, 독일어의 sein동사, 이탈리아어의 essere 동사와 stare 동사, 네덜란드어의 zijn 동사 등이 모두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be 동사”가 상태만을 묘사한다기 보다는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동사가 아닐까 합니다. 성경말씀에 있는 “I am that I am.”을 우리말로 “나는 스스로 있는자다.”라고 번역하는 것은 존재에 대한  “be 동사” 용법의 좋은 예입니다. 조금은 억지스러울 수 있지만, 동사의 문장을 넘어 존재에 대한 이야기로 풀어가볼까 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의 존엄성을 논하기에는 제 지식의 밑천이 드러날까 두렵지만, “be 동사”를 계기로 존재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사회에서만 보더라도, “여권의 신장”이 분명히 있었고, 아직도 가슴아픈 뉴스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예전보다 아이들의 권리도 보장받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권리가 보장받는다는 것이 존재의 존엄성을 보장한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존재 자체가 아름답다”라는 말은 참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공허한 메아리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문장입니다. 거기에 권리가 붙는다면 어떨까요? 제 눈에는 그저 물질주의의 욕심을 채워주는 것 밖에는 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져야할 권리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만, 존재의 존엄성은 권리로 보장받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존엄성이 값으로 매겨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톨스토이 단편집을 다시 보니 기독교적 색채가 강하면서도 노동을 굉장히 중요시 하는 것이 공산주의 이론에 바탕이 되었을 듯 합니다. 공산주의가 실패한 것은 자명합니다만, 거기에는 톨스토이가 강조했던 “사랑”이 빠져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저는 유토피아를 꿈꾸지도 않고, 사상에 대해서도 문외한이지만, “사랑”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존재의 존엄성은 권리가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지 않을까요? 아무쪼록 그 사랑이 아프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