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기사검색

예술은 길다

시론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의사생활을 시작하는 제자들에게 히포크라테스가 했던 조언이다. 원래 문맥은 “인생은 짧고, 예술(의술)은 길며, 기회는 순식간에 지나가고, 경험은 위태로우며, 판단은 어렵다”이다. 히포크라테스가 환자들의 다양한 질병과 싸우면서 수많은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면서 얻은 통찰을 바탕으로 “의술의 길은 먼데, 인생은 짧다”는 의미로 한 말이다. 인간의 신체는 너무나 신비롭고 복잡해서 그 것을 다 배우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고, 그 기술(art)을 익히는 데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 좀 배웠다고 자만하지 말고 환자들을 대할 때 늘 겸손하라는 덕담이었다. 하지만 이 말은 예술의 영역에서 더 자주 쓰이게 되었다. 


이 화가에게도 잘 어울릴 것 같다. 예전 학창 시절에 유명했던 참고서 “완전정복” 시리즈의 표지 그림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1801>을 그린 화가이다. 루브르에 가면 <나폴레옹의 대관식,1806>이라는 그림이 있다. 같은 화가 작품이다. 가로로 9m, 세로로 6m가 훨씬 넘어서 그 곳에 전시된 그림들 중에 두 번째로 크다. 가장 큰 그림은 가장 작지만 가장 유명한 그림과 서로 마주보며 같은 방에 전시되어 있다. 덕분에 가장 큰 그림은 별로 관심을 받지 못한다. 대관식 그림은 루브르에 방문한 사람이라면 한 번씩은 보는데, 그림이 매우 커서 눈에 잘 띄기도 하지만, 주인공 때문이다. 그런데 그림에 얽힌 이야기는 재미있지만 스케일에 버금가는 감동은 없다. 그 이유는 그림의 주인공만 감동할 수 있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화가는 처음에 루벤스의 <마리 드 메디치의 대관식,1624>을 참고했다. 이 그림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나온다. 열광하는 사람, 화난 사람, 무관심한 사람, 부러워하는 사람, 조는 사람, 잡담하는 사람, 악기 조율하는 사람, 떠드는 사람 등의 몸짓들이 일일이 표현되어 있다. 그러니 사실적이며 생동감이 넘친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대관식>그림에서는 사람들의 표정에 감정이 없다. 심지어 어린 조카조차도 한눈 팔지 않고, 200명 넘는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된다. 주인공이 치켜든 왕관.


예술이 주는 선전 효과를 잘 알고 있던 나폴레옹은 당시 최고의 역사화가인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에게 자신의 대관식 그림을 의뢰한다. 프랑스 혁명 당시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며 국민적 영웅이 된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통해 황제에 즉위하고, 자신의 영광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화가에게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스케치에 1년, 그림 작업에 2년이 걸렸다.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의뢰자의 요구와 화가의 상상력이 발휘되어 철저하게 계산되고 연출된 장면들로 가득 채워졌다. 그래서일까. 화실에 직접 찾아간 황제는 그림을 보고 감탄한 나머지 화가에게 “당장이라도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말하며,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그리고 화가에게 많은 상금과 레종 드뇌르 훈장을 수여했다. 다비드는 황제의 수석 궁정화가가 되어 당시 예술계를 쥐락펴락하며 승승장구 했다. 유럽의 지배자가 되고 싶은 나폴레옹, 권력을 추구한 다비드, 패권을 다투는 당시 유럽 상황이 어우러져 이 작품이 나오게 된 것이다.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 유배되었을 즈음에 대관식 그림은 하나 더 그려졌고, 현재 베르사유 궁전에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에서는 나폴레옹의 여동생 중 하나의 드레스가 원작과 달리 핑크 색으로 되어 있는데, 다비드가 그녀를 사랑했다는 설과 원작과 구별하기 위해서라는 설이 있다.


다비드는 어릴 적 펜싱 경기 도중 사고로 좌측 얼굴에 깊은 자상을 입게 된다. 혹자는 성장기 때 그 부상이 양성종양이 되었다고도 하고, 결국 안면 신경에 이상(post-traumatic neuroma)이 생겨 그는 평생 동안 발음, 저작과 표정에 장애를 얻게 되었다. 유머감각과 대중 앞에서 말하는 능력은 그 당시 프랑스의 사교계에서도 중요한 자질이었고, 그의 장애는 사교생활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그에게 “David of the Tumor”라는 별명까지 있었으니 말이다. 훗날 그는 이런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권력에 집착하며 최고의 역사화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다비드는 20대에 그 당시 출세한 화가의 반열에 오르기 위한 두 가지 경력을 쌓았다. 프랑스 왕립 미술 아카데미 졸업과 로마상 수상이다. 미술 아카데미 입학과 진급은 입시지옥에 버금가는 과정을 거쳐야만 할 수 있었다. 로마상은 아카데미 학생들 대상의 국비 장학생 선발 콩쿠르로 1등에게는 로마에 5년 동안 국비 유학 특전이 주어졌다. 무엇보다 로마상은 아카데미의 최고 졸업생이라는 상징성이 있었다. 이 상에 응시하기 위해 선발된 학생들은 두 달 남짓 동안 각자 외부와 단절된 화실에서 아무런 자료도 없이 심사위원들이 제시하는 주제로 역사화 한편을 완성해야 했다. 화가 마네와 드가 등도 도전했지만 수상에 실패했다. 다비드는 3년 연속 고배를 마시며 죽을 결심까지 했고, 이로 인해 나중에 아카데미를 증오하게 되지만, 네 번째 도전 만에 <안티오쿠스의 병의 원인을 찾은 에라시스트라투스,1774>그림으로 1등 수상을 했다.


그는 로마 유학 후 왕립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되고, 루이 16세에게 루브르 궁전의 아틀리에에서 생활할 권리를 얻은 최고 영예의 성공한 미술가가 되었다. 많은 돈을 벌고, 결혼도 하고, 많은 제자들을 두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혁명에 적극 가담하여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고, 그의 이중인격에 실망한 아내는 그와 이혼했다. 대혁명 중에는 국민공회의 의원을 지내며 문화재 보호에도 앞장섰지만, 아카데미 폐쇄에 일조하는 등의 활동으로 정적들도 많이 생겼다.


<나폴레옹의 대관식>그림이 전시된 곳에 <화가 다비드의 자화상,1794>도 걸려있다. 나는 얼굴을 비대칭으로 그린 꾸밈없는 이 그림이 더 눈에 들어와서 사진을 찍었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는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막을 내리고, 혁명 정부에 가담하여 예술계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다비드가 체포되어 투옥된 때였다. 제자가 그림 도구를 챙겨줘서 거울을 보고 완성한 자화상인데, 46세의 자신을 젊고 낭만적으로 그렸다고 하지만 그림 속 그는 편안해 보이지 않는다. 매끄러운 그의 다른 그림들에 비해서 완성도가 떨어져 보인다. 색이 칠하다 만 것 같은 왠지 정성이 덜 들어간 것처럼도 보인다. 알고 보니 미완성 상태다. 그는 생각이 복잡했을까. 하지만 단단히 쥔 붓과 팔레트에서 “나는 화가다”라는 정체성과 자부심이 보인다. 어려움에 처한 자신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인기 초상화가이기도 했던 그는 자화상을 완성하지 않았고, 다시 그리지도 않았다. 나중에 그의 사면을 위해 노력한 아내를 위해 그는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1799>라는 그림을 그렸다. 다비드의 세상에 대한 화해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이 그림에 대중들은 다시 열광했고, 그림 속 여인의 패션이 유행했다고도 한다.

 

대혁명 후 나폴레옹이 집권하여 다시 발탁된 다비드는 전성기를 누리다가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오늘날 벨기에 브뤼셀로 망명했다. 평생 큰 사건의 흥분과 긴장 속에서 살아온 그는 그런 것들과 완전히 단절되자 과거의 넘치던 활력을 거의 다 잃고 말았다. 제자들을 가르치며 재혼한 아내와 조용한 삶을 살았고, 루이 18세로부터 프랑스로 귀국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생을 마감했다. 사후 그에게 “변절자, 처세술에 능한 자, 권력의 시녀, 기회주의자” 등의 비난과 정치에 예술을 이용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다비드는 고대 로마 미술품의 연구를 바탕으로 엄격하고 균형 잡힌 구도, 정확한 표현방식, 장대한 스케일로 신고전주의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방법이 신고전주의 자체로 받아들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업적은 탁월했고, 이후의 미술교육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삶에 대한 평가를 뛰어 넘어서 이제 그는 서양미술사에서 신고전주의 양식의 대표화가이다.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정말 길고 감동적이다. 길어지는 코로나 시국에 의술뿐만 아니라 예술에도 한번 푹 빠져보자.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