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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의학에 손 뻗는 부실 저널의 ‘검은 손’

M사 저널, 실적 급한 교수·연구자 유혹
한국 논문 수 미국·이탈리아 이은 세계 3위
게재료 받고 논문 출판…학계 자정 필요

모 해외 대형 출판사의 저널에 게재된 우리나라 치의학 논문 수가 미국,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 3위를 차지했다는 낭보가 전해졌다.


그러나 이 소식의 이면을 들춰보면 썩 개운치 않다. 해당 출판사는 스위스 바젤에 본사를 둔 출판사 M사인데, 이 출판사가 ‘부실 저널’을 다수 보유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부실저널이란 출판 윤리를 지키지 않고, 비윤리적인 행태를 보이는 저널을 말한다.


때문에 몇몇 국내 대학은 M사 저널에 논문을 게재하는 행위에 주의를 당부하거나, 연구자의 실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 거액의 게재료 받고 논문 출판
M사는 1996년 설립돼 현재까지 무려 369종의 저널을 출판 중인 세계 최대의 ‘오픈 액세스(Open Access)’ 출판사로 불린다.


오픈 액세스란 연구자에게서 논문 게재료를 받아 운영되며, 대신 독자는 무료로 논문을 열람할 수 있도록 한 저널을 말한다. 기존 저널이 독자가 낸 논문 구독료로 운영됐던 것과 차별화된 운영 방식을 취하고 있는 셈이다. 초창기 오픈 액세스는 이처럼 누구나 무료로 논문을 볼 수 있게 한다는 선한 목적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이 같은 오픈 액세스의 운영 방식을 악용한 ‘부실 저널’이 등장하며 문제가 불거졌다. 부실저널은 실적이 급한 연구자의 심리를 이용해 엄격한 심사를 거치지 않고, 거액의 게재료를 받아 논문을 실어주거나, 임팩트팩터(IF)를 인위적으로 높이는 등 비윤리적 행태를 보이기 때문이다.


M사 저널은 이 같은 부실 저널 용의선상에 꾸준히 언급된다. 지난 2014년 제프리 빌 교수(덴버대학교)가 정리한 부실 저널 목록인 ‘빌의 리스트(Beall’s List)’를 시작으로 중국과학원, 노르웨이 국립출판위원회도 주의를 당부했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이 운영하는 건전학술활동지원시스템(SAFE)도 83개의 M사 저널을 현재 논쟁 중인 부실 저널로 분류하고 있다.


# 국내 치의학 논문만 965건…세계 3위
이에 해외는 물론 국내 학계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다. 국내 치의학도 M사의 마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논문 데이터베이스에서 치의학(Dentistry) 키워드로 검색한 결과, M사 저널에 투고된 우리나라의 치의학 논문 수는 이탈리아(1305건), 미국(1242건)에 이은 세계 3위(965건)다. 일반적인 SCIE 저널에 투고한 치의학 논문 수에서 우리나라는 세계 9~10위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과 비교해 격차가 두드러진다.


게다가 SCIE 논문 수 대비 M사 논문 수의 비율을 따져보면 우리나라(4.51%)는 이탈리아(5.21%) 다음으로 높다. 논문 수도 지난 4년간 55건, 142건, 328건, 347건으로 가파른 증가세를 보이는 등 M사에 대한 우리나라 치의학의 의존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짧은 논문 심사 과정을 그 이유로 꼽는다. 논문 검토·승인·출판까지 약 1년이 걸리는 기존 저널과 비교해 M사 저널은 2000프랑(254만원 상당)의 논문 게재료를 내면 대개 한두 달 안에 출판까지의 모든 과정이 완료되기 때문이다.


서울의 한 치과대학 A 교수는 “많은 기관에서 연구자에게 단기간 내 많은 연구 실적을 요구하거나, 정량적 평가로 연구자의 실적을 가려내고 있다”며 “M사는 채용·승진·연구비 심사 등 논문실적이 급한 교수. 졸업을 앞둔 석·박사 과정생의 심리를 잘 파악해 논문 투고 요청 메일을 대량 발송하는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고 말했다.


# 학계 전반 자정 노력 필요
이러한 이유로 일부 학교에서는 부실 저널로 의심되는 곳에 논문 투고를 자제할 것을 경고하거나, 심지어 연구자의 실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움직임도 보이는 등 강수를 둔 상황이다.


물론 일각에선 M사 저널을 모두 부실 저널로 단정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또 출판된 논문의 질이 문제가 없고, 리뷰 코멘트가 합당하다면 문제 되지 않는다는 반론도 있다.


다만 연구자의 윤리와 학술적 권위를 스스로 지키기 위한 자정 노력이 필요하며, 단순히 IF를 합산해 연구자를 정량적 평가에 몰아넣는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부분 정부 과제 평가에서는 IF를 중요시하는데, 기존 치의학 저널은 IF가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어, 연구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적당한 IF를 보유한 부실 저널의 유혹에 빠진다는 설명이다.


서울의 한 치과대학 B 교수는 “완전 무결한 정성 평가는 존재하지 않겠으나 연구자 역량 평가 지표인 ‘H-인덱스’를 고려하거나 전문가 평가를 통해 논문 가치를 인정하는 방법이 있다”고 제언했다.


한 연구윤리 전문가는 “좋은 논문이라면 모두가 신뢰할만한 저널에 우선 투고하는 게 낫지 않겠나”라며 “개인 실적을 목적으로 출판사가 요구하는 고액의 게재료를 국가나 학교의 지원비로 충당하는 경우 도덕적 해이를 넘어 연구 부정으로 여겨질 수 있는 만큼 학계가 부실 학술 활동에 대한 대책 마련을 위해 깊이 있는 논의를 해야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