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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68년도에도 과대광고 골치...“반성문 써야” 결의

특집: '쉰다섯 살' 치의신보의 '라떼는 말이야'
70년대 333 이닦기 ·설탕 덜 먹기 운동 화제
1988년 보철의료보험 절대 반대 격세지감 느껴

구차할 뜻이 없는 그들의 문장은 간결했다. 치과계가 걸어온 모든 순간이 되새김질하듯 차례로 지면에 올랐다, 내려갔다. 1966년 12월 15일, 치의신보가 세상에 나왔다. 크고 작은 기록과 기억들이 치의신보의 지면을 채우고, 다시 치과의사의 일상을 훑었다. 그들의 일상이 우리에겐 신화가 된다. 그 시절 치과의사들을 웃고, 울리던 치의신보의 흔적들을 창간 55주년을 맞아 오롯이 살펴본다.  <편집자 주>   

 

 

올해 쉰다섯 살이 된 치의신보가 결국 ‘라떼’를 소환했다. 중년의 나이가 들어찬 치의신보의 지난 세월을 훑어보는 건 지면은 물론 PDF 파일로도 벅찬 일이었다.


그 시작은 명확했다. 55년 전 12월 창간 당시 ‘칫과월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치의신보는 창간호 알림을 통해 ‘본지는 대한치과의사협회의 기관지로서 치과의학의 향상 발전과 전국 회원의 친목을 도모함에 그 목적이 있다’고 그 소명을 분명히 밝혔다.


역사적 창간호 제1면 첫머리 기사 제목은 바로 ‘치무과 부활’이었다. ‘정 보사부장관은 이번에 보사부 직제를 개정함에 따라 치무과를 부활시키기로 본회 회장단에게 확약하였다’로 시작되는 이 기사는 치무과 부활 추진위원회 구성 등의 소식을 함께 알렸다.


이후 수십 년 동안 구강보건 전담부서가 부활과 폐지를 거듭하며, 지난한 ‘샅바싸움’을 이어갈 줄 그때의 치의신보는 알았을까.


당시에도 과대광고에 대한 반감은 거셌다. 치의신보 제19호(1968년 8월 15일자)를 보면 ‘본회 상무이사회에서는 요사이 과대광고로 인하여 회원들의 비난을 받고 있는 ○○동 소재 모 치과의원장을 경고하고 경고장을 발부하는 한편 반성문을 작성하며 본회회장 앞으로 제출할 것을 결의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1970년대 들어 새마을운동을 비롯한 사회계몽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333 이닦기 운동(1972년)이나 설탕 덜 먹기 운동(1977년) 같이 치과계가 중심에 선 캠페인 역시 세간의 화제가 됐다.


제160호(1978년 4월 1일자) 5면 기사에는 ‘치협과 소비자보호단체협의회가 설탕 덜 먹기 운동 추진 위원회 창립총회를 갖고, 건의문을 채택한 뒤 명동 유네스코 회관을 중심으로 가두캠페인을 벌였다’는 기록이 살아있다. ‘설탕은 아편이다’라는 다소 충격적인 슬로건도 나왔다.


이른바 ‘미스덴탈’도 선발해 꼬박꼬박 치의신보에 인터뷰가 실렸었다. 현재의 사회적 흐름과는 큰 차이가 있지만 환자와 대중을 설득하고 다가가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그때는 읽혔다.

 


제489호(1988년 4월 30일자) 3면의 기사는 ‘치협이 정기대의원 총회에서 본인전액부담 보철의료보험은 물론 보철의료보험도 절대 반대하기로 결의했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틀니와 임플란트가 급여화 된 지금의 치과계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낄만한 대목이다.

 

# 전문의 논쟁의 역사, 종지부를 찍다
‘반백년 논쟁’으로 일컬어지는 치과의사전문의제도(이하 전문의제도)도 빠질 수 없다.

 


1962년 10월 제1회 치과의사 전문 과목 표방허가 시험날 응시자 전원이 불참하면서 시험이 무기한 연기된다. 이미 1951년 국민의료법에 의거 전문 과목 표방 허가제가 실시돼 의료면허보다 상위개념의 자격 취득을 위한 근거법이 마련됐지만 1970년대 들어서도 ‘국민소득 1000불 이상이 될 때’, ‘의료보험제도가 실시될 때’, ‘대다수 회원이 원할 때까지’ 등의 사유로 시행이 늦춰진다.


치의신보 제567호(1990년 1월 13일자) 3면에는 ‘전문치과의사 시행 길터-관련 시행규칙 개정안 입법예고’됐다는 제목의 기사가 대문을 장식한다. 같은 달 당시 이종수 협회장은 신년 인터뷰를 통해 더 이상 제도 시행을 미룰 수 없음을 호소한다. 그럼에도 같은 해 4월 정기총회에서 전문의제도 시행은 또 한 번 유보되는 운명을 맞는다.

 

“성실한 치과위생사 추천” 위생사협회 단체 구직 광고 눈길

반세기 전문의제 도입 공방…현재 절반이 전문의 시대
구인난·구직난 엎치락 뒤치락 끝없는 고민 진행 중


수십 년 세월의 흐름은 결국 치과계가 전문의제도를 품도록 안배했다. 1998년 치과전문의 자격시험 불실시 위헌판결, 2003년 6월 치과의사전문의의 수련 및 자격인정 등에 관한 규정 제정 등을 거쳐 2008년 1월 제1회 전문의 220명을 첫 배출하기에 이른다.


이후 기수련자 경과조치, 통합치의학과 신설 등을 통해 전문의제도는 전면 개방의 길로 접어든다.
본지 제2867호(2021년 8월 9일자) 1면 기사는 ‘치과의사 절반 전문의 시대 개막’이다. 1만5112명의 전문의가 탄생한 시점에서 치과계는 비로소 50년 간 이어온 뫼비우스의 띠를 끊었다.


#화재에 치과 전소, 성금 감사 인사
진지한 정책기사만 독자들에게 가 닿았던 건 아니다. 그 시절 치의신보는 회원 및 치과계의 사랑방과 같은 역할도 했었다.


제96호(1975년 6월 15일자) 3면에 실린 ‘인사말씀’은 화재로 치과의원이 전소된 한 치과의사의 정중한 인사말로 채워져 있다. 그는 “아껴 주시던 회원제위께 놀라움을 드린 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정성 어린 성금에 새로운 용기를 얻어 보람 있는 재건을 다짐하면서 금번 관악구에 치과의원을 개설하였다”고 지면을 통해 안녕을 고했다. 일터를 잃어버린 동료를 위해 십시일반 성금을 낸 동료들, 그에 대한 한정 없는 감사의 마음을 그 시절 치의신보는 활자로 치환했다.


국시 합격 소식을 다룬 제132호(1977년 2월 1일자) 4면에서는 기사 하단에 친절하게도(?) 불합격자의 수험 번호까지 병기하고 있었다.


이후에는 치과계 안팎의 동정과 소식들을 전하는 ‘치계포스트’가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대략 누가 상을 받았고, 누가 어떤 일을 했다는 내용을 다룬 이 섹션 중 단연 눈에 띄는 구절이 있어 30년의 시차를 두고 지면에 소개한다.

 


제232호(1981년 5월 10일자)를 보면 ‘성실한 치과 위생사를 추천해 드립니다’라는 단문과 함께 구인 연락처를 올린 이가 있었으니, 바로 ‘대한치과위생사협회’이다. 요즘 구인난의 정황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당시의 ‘단체 구직 광고’였다.


하지만 이 같은 분위기도 1990년대 들어서면 서서히 바뀌기 시작한다. 제651호(1991년 11월 2일자)에서는 ‘보조인력 구인난이 최근 들어 더욱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치과위생사 및 간호조무사의 인력 수급대책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지적하는 기사가 실렸다.


반대로 7년 뒤인 제942호(1998년 3월 7일자)에 실린 기사는 치과의사 박 모 원장이 일주일 동안 40여 장의 치과위생사 이력서를 받았다는 내용으로 문을 열고 있다. IMF 한파로 경제가 최악 국면에 빠지고 구직난이 심각해지면서 치과위생사들이 대거 취업전선으로 뛰어들고 있다는 분석이었다.


매달 수십만 원의 비용을 내고 한숨과 함께 구인구직 사이트를 들여다봐도 이력서 한 통 받기 어려운 오늘날의 ‘동네 치과의사’에게는 정말 ‘라떼’와 같은 풍광일 것이다. 그래도 그땐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