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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친절하기

시론

논란의 여지가 있었지만 최근 정부는 이태원 할로윈 축제 사고로 1주일간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었다. 찬반 논리나 먹고 사는 문제는 잠시 뒤로하고 한 송이 꽃보다 아름답고 꿈과 희망을 품고 하루 하루 삶을 살아가던 젊은이들이 어처구니 없는 인재로 생명이 꺼졌다는 것에 모두 동의할 것이다.

 

이어령 선생은 생전에 썼던 마지막 책에서 “나는 타인의 아픔을 잘 모르고 삶을 살았었다”고 겸손하게 회고 하였다. 그러면서 사랑에 대하여 논하기를 그는 타인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게 사랑이고, 그 자리가 윤리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또 그에게 살면서 가장 아쉬웠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물었을 때, 그는 먼저 보낸 딸에게 살아 생전에 꼭 필요했던 순간에 “미안하다. 사랑한다.” 말해주지 못한 것이라고 하며 눈물지었다. 결국 내가 아닌 존재에 대한 절대성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삶을 마무리해 가던 한 노학자의 큰 가르침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영화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서 참혹한 전쟁터의 청년들이 죽어 나가지만 그렇게 전쟁을 치루던 어느 날 최고사령부의 공식 발표에서는 ‘서부전선 이상 없음’이라고 나온다. 거기선 백 명 이상 죽으면 이상이 있지만, 한 사람이 죽으면 아무런 이상이 없다. 그런데 죽어간 폴의 어머니에게 과연 서부전선에 이상이 없었던 걸까? 나의 고통이 ‘이상 없음’으로 처리될 때, 타인의 안도 속에서 더 큰 소외가 일어난다. 남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타인을 모르는 것이다. 안다고 착각할 뿐.”이라고. 이유를 막론하고 우리가 이태원의 젊은이들을 애도하는 것은 남의 아픔을 공감하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주변에서 안타까운 소식이나 부고를 접하고 나는 삶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리 대부분은 가장으로서 원장으로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감당해 내야 할 삶의 무게들이 있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돌볼 여력이 없는 바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보면 우리가 타인의 어려움에 대해서 잘 공감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 이유는 우리 스스로가 제대로 보살핌을 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남을 이해하고 애도할 수 있으려면 내 스스로가 남을 돌볼 수 있는 능력과 여력이 있어야 한다. 내 스스로가 평온해야 한다. 우리가 진료실에서 환자들에게 잘했던 때를 생각해보면 내가 푹 자고, 푹 쉬고, 스스로 편안했던 때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을 잘 보살피고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

 

삶의 모든 과정은 끊임없이 변하고, 우리네 인생은 항상 바라는 대로만 되지도 않는다. 행복과 불행은 번갈아 오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마냥 즐거워 할 수도 없고, 불행하다고 계속 슬퍼할 필요도 없다. 영원한 행복은 없다. Carpe diem. 우리가 현재 행복한 이 순간에 더 집중해야 하는 이유이다.

 

니체는 자신의 일에서 충분한 쾌락을 발견하면 방탕한 삶을 살 필요가 없어진다고 하였다. 참으로 어려운 잠언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는 환자들에게 칭찬을 듣거나, 감사의 말을 들었을 때는 행복하고 보람 있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재능기부 해줬을 때도 행복하다. 그러고 보면 자신의 일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어느 작가의 글 중에 “친절 하라. 당신이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힘겨운 전투를 치르고 있으니.”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바꾸고 싶다. “내 자신에게 친절 하라. 내가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과 내 자신은 힘겨운 전투를 치르고 있으니."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