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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우산

이미연 칼럼

주말에 집밖으로 나서는데 비가 내렸다. 일기예보에서는 저녁에야 비가 온다고 해서 부담없이 나섰는데, 우리 동네에는 맞지 않았다. 날씨예측은 슈퍼컴퓨터가 아니라 양자컴퓨터의 보급 시대가 오더라도 일기예보가 정확하게 맞기는 어려워지지 않을까? 도시들이 점점 커지니 이름은 같지만 실제로 커버해야 하는 지역은 넓어지고, 고층 빌딩이나 택지개발로 바람과 비구름에 영향을 미치는 세부 지형이 바뀌어 가고 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기대치 자체가 달라진 것 같다. 이전에는 그날 비가 오는 지만 알아도 하루 종일 대비를 하고 다녔을 텐데, 이제는 휴대폰 앱에서 시내버스 도착시간을 분 단위로 알려주듯, 너무 정확한 예보를 바라게 된 것 같다.


우산을 쓰기도 안쓰기도 애매한 가랑비지만 공기는 제법 쌀쌀했다. 이전 같으면 잠깐 이 정도는 괜찮다며 비를 맞으며 길을 나섰을 것이나, 감기 후유증으로 단단히 고생을 한 다음부터는 몸을 사리게 되었다. 귀찮아도 우산을 챙기기 위해 집으로 다시 올라갔다.


우리 집에는 우산이 아주 많이 있다. 수건도 그렇지만, 우산도 이곳저곳에서 기념품이나 사은품으로 받다 보면 어느 순간 너무 많아진다. 몇 개는 직접 산 것이지만, 심사숙고해서 고른 것은 아니고, 갑자기 비를 만났을 때 가까운 편의점에서 적당히 집어 든 것이다. 비싸지도 않으니 대충 쓰다가 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렇게 보면 요즘 세상이 참 풍요로운 것 같다. 물자도 정보도 너무 많고 흔하여, 귀히 여길 생각을 하지 못하게 지천이다.


오랜만에 체크무늬 긴 우산을 꺼내 들었다. 초등학생 때 어머니가 주신 나와 동생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신 나름 골동품이다. 남동생이야 당연히 자기 몫을 애저녁에 잃어버렸고, 나는 어쩌다 보니 여태 간수하고 있었다. 짱짱한 새것으로 받았을 때에는 항시 가지고 다녔지만, 학년이 올라가면서는 접을 수 있는 작은 가벼운 우산을 새로 장만하게 되었다. 그래도 장마철에는 매일 가지고 다녔는데, 사회에 나오고 운전을 시작하게 되며 점점 쓸 일이 없어진 탓이다.


한때는 매끄러운 나무손잡이에 두툼한 방수천이 고급스러웠는데, 세월의 세례를 받아 나무 결은 갈라지고 천이 접히는 곳이 미어져 얇게 비쳐 보이게 되었다. 빗물이 거세면 얇아진 천 사이로 빗방울이 스밀 때도 있어 비가 많이 오는 날은 적당하지 않고, 비가 올지 어떨지 모르는 날에 들고 다니기에는 커서 거추장스럽다. 옛날이야 해어진 천을 덧대 꿰매거나 새 천으로 갈아주고, 휘어진 우산살이나 부서진 손잡이도 교체해가며 썼다지만, 요즘 우산을 고쳐 쓰는 물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차피 우산은 넘쳐나고 수선점 찾기는 어려우니, 쓰지도 고치지도 않으며 외려 오래도록 보존되어버렸다.


다행히 빗줄기가 가녀려서 낡은 우산이 모처럼 쓸모를 찾았다. 그러나 이렇게 한 번 쓰기위해 우산을 수십년 집안에 보관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만약에 내게 우산이 이것 하나뿐이었다면, 있는 것에 감사하며 아껴 썼을 것이다. 팩트 자체는 달라질 것이 없지만 정황판단은 많이 다르다.


임상 현장에서는 의외로 이런 갈등상황을 자주 마주한다. 이 치아를 뺄까 말까, 이 지대치를 씌울까 말까? 교과서적인 정석의 답은 정해져 있다. 임상에서는 환자 상태의 예후와 사회경제적 위치, 그리고 이 환자를 오래 보아온 임상의로서의 나의 경험과 가치판단의 문제가 결정을 가를 때가 많다. 어떻게 하면 결과가 더 좋을까 고심하고, 환자는 몰라주겠지만 내가 갈려서라도 가장 최선의 방도가 무엇일까 치과의사는 고뇌하게 된다. 자신이 보지 않은 환자에 대해 섣불리 왈가왈부하는 이는 하수라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회무도 그런 듯하다. 명백하게 흑백으로 갈리어 어느 한 편에 답이 있는 경우가 도무지 없다. 왼쪽을 택하면 오른쪽은 서운하고, 오른쪽 상방으로 방향을 잡으면 하방의 목소리가 아쉬워진다. 끊임없이 스텝을 밟으며 가능한 균형을 잡아 가급적 많은 이에게 골고루 이롭도록 하드캐리하는 것이 모임을 이끄는 자들의 숙명이다.


회원들이 단면만 보고 오해하도록 만드는 것은, 복잡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잘 전달하지 못한 잘못도 있다. 그렇지만 오랜 기간 회무를 하며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설명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유리한 입지에 서기 위해, 일부러 앞뒤를 잘라 말을 만들고 침소봉대하여 회원들을 양떼 취급하며 몰이하여 사태를 키워서야 되겠는가. 의정사태가 산넘어 산으로 해결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정치적 파벌을 만들어 대립하는 일이 얼마나 쓸모없는지 알 수 있다. 어차피 우리편은 아무도 없으며, 우리가 뭉쳐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올해는 심지어 대한치과의사협회 창립 백주년을 맞은 경사스러운 해였다. 우리의 보금자리는 민족의 건강과 우리 회원들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모인, 우리의 아주 오래된 유산이다. 다투어야 할 일이 있더라도 우리 회원의 안녕을 먼저 고민하고, 대립되는 의견이 있더라도 우리의 존립 자체를 우선시 하여야 옳다고 생각한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