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의사로서 나는 행복한가?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우리 모두는 그다지 능숙치 못하다. 우리의 마음은 그 자체가 안고 있는 문제를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기에, 다소 인위적인 성찰 없이는 그 내면의 상태를 명쾌하게 규명하기 어렵다. 이때 우리는 철학이라는 소중한 수단의 도움을 받게 된다. 철학의 임무는 우리 각자가 원인 모를 불행과 우울을 해석하도록 도와주고, 그 해석에 기반하여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역사속의 수많은 철학자들 중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몰두했던 분으로서 나는 주저없이 에피쿠로스를 꼽는다. 쾌락주의라는 사조를 열었던 에피쿠로스는, 인생의 의미를 “쾌락을 느끼는 것”으로 정의할 정도로 만족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 힘썼다. 기존의 철학자들이 정신적인 것에 몰두하느라 금욕을 강조했던 것과 다르게 에피쿠로스는 감각적인 쾌락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쾌락이 행복한 삶의 시작이자 목표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쾌락 그 자체를 추구했던 에피쿠로스는 실제로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살았을까? 결코 아니다. 에피쿠로스의 삶은 일반인의 관점에서 금욕주의자들의 삶과 크게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절제되어 있었다. 주장하는 바와 실제 삶이 일치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쾌락에 대한 그의 집착은 실제로 그 누구보다 강했지만, 그는 쾌락을 어떻게 누리는 것이 주관적 만족감을 극대화시킬 것인가에 대해 몰두했던 것이지, 쾌락적 자극의 총량을 어떻게 하면 더 늘릴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게 아니었다.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자극의 총량은 그에게 있어 쾌락을 누리는 데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진정 쾌락 그 자체를 추구할 줄 아는 현명한 자는, 적게 주어진 자극 상황에서도 어떻게 쾌락을 누릴지에 대한 자기 나름의 개성적 사유가 명쾌하게 서 있는 자이지, 자극 상황을 많이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자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대동소이한 일상을 향유하면서도 충분한 양의 쾌락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는 진정한 삶의 기쁨을 누릴 사색의 양이 부족한 것이고, 그의 삶은 행복해지기 어렵다고 보았다.
결국 우리 삶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은 스스로의 마인드 세팅이 어떠하냐의 문제 즉, 같은 일이 닥쳤을 때, 그것을 어떤 인지의 툴로 받아들여 만족스러운 결론을 얻느냐의 문제이지, 얼마나 많은 쾌락적 자극이 주어지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한 사람의 일생에 주어지는 자극의 절대량은 편차는 있겠지만 사람별로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 사람이 정말 쾌락을 향유하고 행복하게 사느냐의 편차는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그만큼 쾌락이란 주관적인 것이고, 어떻게 그 상황을 인지하느냐의 문제, 즉 자신의 내부적 마음가짐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지, 외부적 환경에 의해 좌우되는 수동적인 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개원의들의 삶은 대체로 크게 다르지 않다. 경영을 신경 쓰고 직원을 관리하며 환자와 소통하여 진료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생계를 꾸린다. 그런데 진료와 경영이라는 것은, 음악이나 미술, 체육 등과는 달리 그 자체로서 즐기기 어려운 것들이기에 여간해선 그 행위 자체에서 본능적인 쾌락을 느끼기 쉽지 않은 것들이다. 에피쿠로스에 따르자면 이런 경우엔 사후적인 사색을 통해 내가 그것들을 인지하는 방식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쾌락에는 여러 차원이 존재한다. 그 자체로 환자를 치료하며 즉자적인 쾌감이 솟아오르지는 않지만, 환자가 나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혹은 내가 숙원해왔던 진료적 이상을 환자 구강 내에 실현시킴으로써 얼마든지 우리는 목표에 대한 성취감이나 윤리적 차원의 보람 등을 느낄 수 있다. 혹은 그 고생이 금전적 보상으로 이어져서 느끼는 쾌락도 진료행위를 기쁘게 느낄 수 있는 동기가 될 수 있다. 에피쿠로스는 금전의 축적이 주는 쾌락도 좋은 쾌락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단, 그는 금전이라는 단일요소에 쾌락의 대부분이 집중되어 있는 경우, 금전의 증가가 일정수준 이상이 되면, 쾌락은 더 이상 금전의 양에 비례하지 않게 되므로, 사색의 양을 늘려 금전의 증가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불만족을 보완하는 것을 권했다.
그런데 여기서 나름의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소위 신 포도 논리니 정신승리니 하는 말들이 행복을 위한 마인드 세팅을 비하하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신 포도 논리, 즉 정신승리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누군가는 해봄직 하다. 그러나 이솝우화의 신 포도 이야기에서 여우의 행위는 그 실체적 비참함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주어진 문제를 축소 또는 왜곡하여 인식했던 그 지점 때문에 비판의 명분이 생겼던 것이지, 주어진 상황에 대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마인드 세팅을 시도했던 것 때문에 비판받았던 게 아니다.
에피쿠로스의 사색은 애초에 왜곡을 허용할 동기 자체가 없다. 실체 그대로를,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넘치면 넘치는 대로 그 자체로서 인지하고, 그 있는 그대로의 겸허한 현실을 바탕으로 긍정적인 의미부여를 하는 것이다. 이솝우화의 여우에게 적용해보자면,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여우는, 애초부터 포도나무까지 뛰어오르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잘 알고 있다. 딱 그 정도밖에 뛰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비참하게 인식하지 않으므로, 그 현실을 부정할 동기가 애초에 없다. 따라서 우화에 등장하는 포도는, 그저 내가 도달하지 못할 곳에 존재했을 어떤 포도일 뿐, 그 포도가 신 포도였는지 단 포도였는지 굳이 평가를 내릴 동기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이정도 뛸 수 있는 게 현실이라면, 높은 곳의 포도를 바라보며 정신 허비하지 말고, 닿을만한 곳에 더욱 더 달콤한 포도는 없는지 살펴보면서 긍정적으로 주어진 이 순간을 소비하자는 게 에피쿠로스적인 여우의 자세이다.
많은 젊은 치과의사 선생님들이 개원을 앞두고, 또는 수련을 선택할 것이냐 개원가를 선택할 것이냐를 앞두고 고민에 빠진다. 그리고 그 상황의 스트레스 때문에 치과의사가 된 것을 후회하며 새로운 진로를 개척해볼까 하는 충동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상 그 어떤 다른 선택을 했다고 한들, 인생이 크게 달라졌을 것인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이 치과의사로서의 길도, 그 당시 이 길을 선택할 그 시점에 있어서는 선택가능한 최선의 결과였을 것이고, 그걸 선택함으로써 기대했던 여러 장점들을 현시점 충분히 누리고 있는 상황일 것이다. 누리고 있는 부분에 대한 장점을 보지 못하는 마음가짐을 지녔다면, 무슨 다른 선택을 했다 하더라도 후회만이 남을 것이고, 그나마 누리게 된 것에 감사해하는 마음가짐을 지녔다면, 지금까지 이룬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지금 현시점 내 상황이 한없이 불만족스러운 상황이라면, 그것은 세상을 보는 내 인지의 문제인 것이지, 과거의 어떤 특정한 선택 때문인 게 아니다.
세상엔 특별히 다른 이상적인 길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적당히 유리하기도 하고 불리하기도 한 길들을 선택해가면서, 유리한 선택은 유리한대로 불리한 선택은 불리한대로 있는 그대로를 가감 없이 인지하면서 불필요한 좌절 없이 마음을 다잡아가며 내일을 맞이하는 게 우리의 인생이다. 누구에게나 크게 다를 바 없이 주어지는 우리의 인생을 기쁘게 즐기다 가려면, 우리는 에피쿠로스가 강조한대로, 적은 자극 속에서도 즐거움을 누리는 자신만의 철학적 잣대를 갖추고 세상과 호흡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