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에 개봉된 “스모크 Smoke(웨인 왕 감독, 폴 오스터 각본)”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를 전공의 말년 차 시절에 보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생각나는 영화이자 어쩌면 나에게 인생 영화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기 렌(Auggie Wren, 하비 카이텔 연기)은 브루클린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작은 담배 가게 주인이다. 소설가 폴(Paul Benjamin)은 임신한 아내가 3년 전 권총 강도의 총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에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 어느 날 저녁 폴이 담배를 사러 갔다가 오기가 11년 동안 매일 아침 8시에 담배 가게 맞은편 코너의 동일한 장소에서 사진을 찍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오기는 폴에게 자신이 찍은 4000장이 넘는 사진을 보여준다. 사진첩을 넘기면서 “이거 뭐 똑같은데” 하고 폴이 심드렁하게 말하자, 오기는 “모두 똑같아 보이지만 한 장 한 장이 다 다르다, 날씨도, 지나가는 사람도, 옷도 다 다르다. 천천히 봐야 이해할 수 있다(You’re going too fast. You’ll never get it if you don’t slow down)”고 말한다. 그제야 폴은 사진을 한 장씩 자세히 보게 되는데, 갑자기 한 사진에서 멈춘다. 출근길에 오기의 카메라에 우연히 찍힌, 살아생전의 아내 사진을 발견한 것이다. 죽은 아내를 다시 떠올리며 흐느끼는 폴에게 오기는 말없이 어깨를 감싸준다.
항상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자세히 다시 들여다본다는 것은 덧없이 지나가는 것에서 의미를 끄집어내는 행위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반복적인 행위 속에서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제공해 주는 핸드폰에 매달린 우리는 반복적으로 천천히 다시 보는 능력을 잊어가고 있다. 같은 자리에, 같은 시간이지만 천천히 다시 보게 되면 그 순간이 찬란한 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는 오기가 그 카메라를 어떻게 얻었는가를 폴에게 이야기하면서 마무리된다.
담배 가게 점원 시절, 오기는 한 흑인 소년이 잡지를 훔쳐 도망가는 것을 뒤쫓다가 소년이 떨어뜨린 지갑을 줍게 된다. 그 안에는 운전면허증과 사진이 있었다. 그 소년이 상을 받고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과 소년의 어머니와 함께 찍은 어릴적 사진을 보자 오기는 더 이상 화가 나지 않았고, 지갑을 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에 면허증에 적힌 주소로 직접 찾아가게 되었다. 낡은 아파트에 그 소년은 없고 80~90살 되어 보이는 시각장애인 할머니만 혼자서 살고 있었다. “네가 올 줄 알았다 로저, 네가 크리스마스 때는 이 할머니를 잊지 않을 줄 알았다”라고 말하며 두 팔로 오기를 안았다. 오기는 자신이 차마 할머니의 손자가 아니라고 말을 못 하고 “맞아요. 할머니, 크리스마스라서 할머니 뵈러 제가 돌아왔어요”라고 자신이 손자인 것처럼 껴안았다. 눈먼 할머니가 오기를 손자로 잘못 알았을 수도 있으나, 손자가 아닌 줄 알면서 오기를 손자처럼 대했을 수도 있다.
눈이 안 보이는 할머니 혼자 사는 집에는 크리스마스인데도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오기는 근처 가게에 가서 닭고기 등을 사 와서 와인을 마시면서 할머니와 즐거운 저녁 식사를 함께 하였다. 할머니는 식사 후에 소파에서 스르르 잠이 들었다. 오기가 화장실에 가니 손자가 훔쳐 온 것으로 보이는 카메라 6~7대가 상자가 뜯기지 않은 채로 있었다. 이전에는 사진을 찍어본 적도, 물건을 훔친 적도 없었던 오기는 갑자기 카메라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가 깰까 봐 오기는 그 소년의 지갑을 테이블 위에 두고 카메라 하나를 들고 조용히 그 집을 나왔다. 자신이 가장 죄스럽게 생각하는 일을 했다면서 카메라를 돌려주려고 몇 달 후 다시 갔더니 더 이상 할머니가 살고 있지 않더라고 하였다. 자책하는 오기에게 폴은 어차피 카메라는 도둑맞았었던 물건이었고, 그래도 할머니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함께 했으니 됐다고 이야기한다.
이 영화에는 여러 주변인이 등장하는데, 가족이 해체되었거나 주위로부터 버림받은 불행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18년 전에 오기를 떠나버린 옛 애인 루비는 예전에 당신과의 사이에 낳은 딸이 있다고 우기면서 당신 딸이 미혼모가 될 상황이니 오기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찾아오고, 자신의 음주 운전으로 인해 아내가 죽고 근근이 생계를 꾸리는 카센터 주인 사이러스에게 자신이 버린 아들 루시드가 찾아온다. 루비는 한쪽 눈을 잃었고, 사이러스는 왼팔을 잃었고, 폴은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고, 손자를 기다리는 할머니는 앞을 보지 못한다. 모두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결핍된 상태이며 더 나락으로 떨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타인에게 마음을 여는 따뜻한 마음이 하나씩 모이자 그것이 인연이 되어 실타래 같은 관계가 이어진다. 영화에서는 소외된 주인공들끼리의 작은 배려들로 인하여 그런대로 인생이 살만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의 맨 마지막, 오기가 폴에게 카메라 이야기를 다 들려주고 나서 두 사람이 함께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자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며 오기가 들려주었던 이야기 속 장면들이 흑백 화면으로 나온다. 이 마지막 장면의 배경음악이 탐 웨이츠(Tom Waits)의 “Innocent when you dream”이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kcU6lvF5Eco). 탐 웨이츠는 마치 거친 통나무가 세게 긁히면서 내는 소리처럼 허스키하고 정제되지 않은 목소리로 쥐어짜는 듯한 저음을 내기 때문에 이 사람의 노래를 한번 들으면 잊을 수가 없다. 그 노래가 영화의 내용과 참 잘 어울린다.
작가 폴 오스터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지만 암울하고 외로운 뉴욕 생활에서 만난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무언가가 없을까 하는 생각에 소설을 썼다고 한다. 실제로 작가는 1990년 뉴욕타임스에 뉴욕과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한 단편 소설을 의뢰받았는데 도무지 스토리가 떠오르지가 않았다가, 브루클린의 평소 다니는 담배 가게 주인을 모티브로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는 글을 쓴 것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마침 크리스마스에 뉴욕타임스를 읽다가 그 단편을 접한 웨인 왕 감독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뉴욕으로 찾아와서 작가에게 영화로 만들자고 설득하였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여러 번의 각색 작업을 거쳐 영화를 만들었고 베를린 국제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하였다.
영화를 보고 몇 년 후, 독일 Freiburg 대학병원에서 잠시 머무를 때 Zelt-Musik-Festival Freiburg (텐트를 쳐서 만든 공연장에 각종 공연이 이루어지는 음악 축제)가 열렸다. 놀랍게도 탐 웨이츠가 온다는 것이었다. 나는 같은 기숙사에 있던 전공의와 기말고사를 마친 의대생들과 함께 그 공연을 보러 한 시간 동안 자전거를 타고 시 외곽의 공연장에 도착하였다. 공연 텐트 안은 의자가 아닌 커다란 통나무가 한 줄씩 놓여있었고 반쯤 서서 공연을 듣게 되어 있었다. 관객들은 맥주나 와인을 한 잔씩 손에 들고 정말 술과 담배에 푹 빠진 것처럼 보이는 그의 노래를 들으며 “You’re innocent when you dream (현실이 힘들어도) 당신이 꿈꿀 때는 순수하다” 가사를 함께 흥얼거렸다.
영화에서 주인공 폴 역할을 맡았던 윌리엄 허트도, 영화의 시나리오와 원작 소설을 썼던 폴 오스터도 이제는 세상을 떠났지만, 크리스마스에 인간적인 온기를 불어넣어 준 이 영화를 떠올리면 아직도 따스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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