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즈음 음악을 듣지 못한다. 음악을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들으려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음악으로부터 해방된 기쁨을 나 스스로가 만끽하고 있다는 표현으로 변명을 만들면서 음악을 멀리하고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대학 시절이나, 청년기에 나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가히 광적이라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였다. 그 시절은 가난하고 암울한 시기였다. 음악을 좋아하고 듣고 싶어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장소나 기회가 없었고, 더구나 오디오 장비나 레코드 같은 도구를 접하기는 더더욱 힘들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어렵게 구한 레코드를 사들고 와 음반의 포장을 뜯고 윤이 반짝거리는 속 알맹이를 조심스레 꺼낼 때의 그 짜릿한 느낌, 그 순간의 행복, 밤새워 그것을 몇 번씩 되풀이 듣곤 했던 기억들. 지금 생각하면 행복했던 시간이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보다 더 좋은 시스템에 양질로 녹음된 콤팩트디스크가 지천으로 널려있지만, 아무래도 그 때의 짜릿한 감흥과 행복감이 생겨나지 않는다. 음악이 우리 주위에 너무 풍요롭기 때문에 오히려 그 절실함이 없어진 듯 하다.
음악이 단순히 생활의 즐거움으로 자기 승화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취미나 수단이 돼야 하는데도 나의 경우에는 음악에 지나치게 집착해 음악을 분석하거나 해석하려 했고 음악의 아름다움을 나름대로 평론하려드는 지나친 욕심이 있었다. 그런 내모습에서 음악이 나에게 즐거움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고통스러운 존재가 되고 있음을 깨닫게 됐다. 차차 나이가 들면서 ‘음악으로부터의 해방’ 되고 싶은 느낌을 받게 된 것은 내가 전공하고 있는 치의학에 대한 집념이 생기면서부터였다.
음악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이 나의 전공인 의학 속으로 숨을 죽이며 용해돼 들어오는 듯 했다. 그때부터 음악에서만은 순수한 청중의 입장으로 돌아가 의자 등받이에 느긋하게 등을 기대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해방감을 맛보게 됐다. 그 해방감을 느끼는 기쁨에는 음악 그 자체보다 더한 즐거움과 행복감이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요즈음 나는 의학(의술)으로부터 탈출해 보고 싶은 충동을 금할 수가 없다. 얼마 전까지만해도 나는 사람의 입(구강)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많은 세월을 보냈다. 그 입속, 즉 구강속에 모든 병리와 세상진리가 있는 것을 착각하면서 지내왔던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어느날, 구강으로부터 밖으로 탈출돼 나오니 구강이 아닌 사람(人間)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입속의 질환만 보았지 사람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겨우 입속에서 빠져나와 보니 이제는 의학 밖으로 다시 탈출하고픈 생각이 들게 됐다. 의학도가 의학 밖으로 나와서 객관적으로 의료의 세계를 관조해볼 수 있는 시각을 갖고 싶어진 것이다.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의료계라는 우물 속에서 서로 자기의 의술을 뽐내고, 경쟁하고, 잘난 척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과연 우리들이 하고 있는 행동들이 의료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지나치게 의료 속에 함몰돼 있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의학 밖의 세상을 빠져 나와 세상을 보면 ‘세상은 너무나 넓고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을 보게 된다. 의학계가 지금까지 너무 의학 본질, 그 자체에 집착했거나 그 속에서 안주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는 동안, 의학계는 점점 사회와 격리되어지는 특수 이기집단으로 변모돼 온 것은 아닌지? 의학이 지나친 과학 이론과 접목돼 최첨단 장비와 기술을 개발하면서 점차 인간(사람)을 의학에서 배제시키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오히려 고답적이고 형이하학적인 이론과 방법론에만 집착하고 있는 의학이라는 굴레에서 한 번쯤 자유로워질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의료계는 어딘가에서 뚝 떨어진 특별한 위성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의료계는 사회 속에 존재하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생물체 같은 것이다. 의료인들도 지나치게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