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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의 원장 이야기 치과 역사(26)]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하)

<제1333호에서 계속>

 

1941년 10월 22일 ‘대학학부 등 재학 연한 또는 수업연한의 임시 단축에 관해’라는 칙령 924호로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도 6개월 앞당겨 교육과정이 3년 반으로 줄었고, 1941년 9월 30일 제13회 졸업식을 가져서 1941년에는 2번의 졸업식이 있었다.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의 졸업생 1459명중 한국인은 452명으로 31%였다. 이렇게 치과의학전문학교로 개편되면서 일본인이 많아진 결과는 치과의학전문학교 교육을 일본인이 더 차지한 것을 의미한다. 경성치과의학교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의 졸업생은 총 1635명으로 한국인 555명의 34%였고, 일본인 1080명으로 66% 였다. 또 소수의 대만인 졸업생들도 있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인 치과의사의 양성을 위해 조선인 학생을 위주로 선발하려 했던 처음 계획과는 달리 일본인이 주로 공부한 학교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나기라 다쓰미는 연구 지원을 하며 학위를 받도록 연구 성적을 독촉하실 정도로 열의가 있었다. 또한 그는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가 일본에서 늦게 생긴 학교이기 때문에 일본에 있는 학교에 뒤지지 않도록 연구업적을 발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학위를 받은 다음 야오 타로(失尾太郞)·카키미 요죠(垣見庸三)·니시야마 유기오(西山幸男)·히로타 세이이찌(弘田精一)·호리 타께시(堀武)·박명진(朴明鎭) 등에게 의학박사의 학위를 취득하게 했다. 실험연구에 필요한 비용은 쉽게 지출하고, 필요한 도서를 갖추어 나갔다.


그러나 연구를 진행시키는 데에 문제점이 발생하기도 했다. 나기라 다쓰미의 실험적 치통 야기 방법에 의한 실험을 1932년 4건, 1933년 4건, 1934년 1건을 했는데 이 치통 야기 방법에 대해 각 방면에서 의문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이에 야오 타로(失尾太郞)는 나기라 다쓰미의 실험적 치통 야기 방법이 타당하다고 역설(力說)하기도 했다.


1932년 10월 30일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는 학교를 배경으로 경성치과의학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 학회에서는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교우회원 및 회의 목적에 찬성한 일반치과의사를 정회원으로 하고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학우회원을 준회원으로 조직했다.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장 나기라 다쓰미가 회장직을 맡았고, 경성치과의학회는 이꾸다 싱호(生田信保)가 회장인 조선치과의학회와 경쟁적으로 활동했기에 규모 면에서 양적인 팽창을 가져왔다. 경성치과의학회는 해마다 졸업생으로 인해 회원이 증가해 학회의 힘이 지속적으로 증강됐다.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는 군국주의 교육에 적극 호응하기도 했다. 1930년 8월 18일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에 일본 육군의 현역 배석장교를 배치 받았다. 나기라 다쓰미는 학교교련을 중요시해, 1934년부터 1945년 종전까지 조례에서 규율을 강조했다. 그 결과 각 전문학교 이상의 학교에서 성적이 우수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규율을 강조한 이유는 학교가 서울의 중심에 있어 학생의 행동이 많은 사람의 표적이 되므로 군사교련에 의해 사회에서 좋은 평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1940년대에 이르자 교련은 야영훈련에 실탄사격훈련까지 실시했다. 이러한 군사교련으로 보아 식민지 지배자의 논리대로 군사적, 강압적인 통치방법에 호응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전쟁이 한참이던 1942년 한국인 청년에게도 징병제가 실시되고, 의(醫) 치(齒) 약(藥) 공(工 광산과)학생에게는 징집이 면제되자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에 많은 입학지원자가 몰리기도 했다. 1943년 100명 모집에 1000여명, 1944년 2700여명이 지원자가 있었다. 1944년 징집제도가 폐지되자 1944년 가을부터는 학업을 중단하고 피하기도 해 결석자가 늘었다.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는 학생활동을 쉬지 않고 계속했다. 각종 운동부로는 야구, 정구, 탁구, 유도, 검도, 궁도, 축구부 등이 있고, 문화면으로 미술, 문예부 등이 있었다. 몇몇 분야에서는 입상을 할 정도의 실력으로 자라기도 했다.


1937년 11월 1일 중일전쟁 당시 한국 내 전문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