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 없으면 오늘 같이 봉사갈 수 있겠니?”
모처럼 온 가족이 모인 일요일 아침 식탁에서 아버지께서 물으셨다. 이전 같으면 1주일 내내 그만큼 했으면 됐지 일요일까지 무슨 놈의 진료냐면서 장난 섞인 반항을 한번 했겠지만 얼마 전 평소처럼 귀를 잡아서 끌고 가실 것을 예상한 반항에 섭섭한 표정으로 정말 혼자 가버리셨던 일을 상기하면서 순종적으로 따라 나섰다.
인사동 근처의 노인복지센터. 학부생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봉사를 다녔고 이제 열린치과의사회 회원이기도 하지만 이곳은 처음이다. 약간은 뿌듯함과 약간은 설레는 마음으로 진료실에 들어섰지만 얼마 안가서 큰 후회가 밀려왔다. 대부분의 환자가 denture repair(틀니 수리)가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일반인에게는 틀니 그까짓 거 플라스틱으로 대충 만들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denture 제작은 상당한 기술과 지식이 필요한 것으로 수리 역시 미숙한 의사가 함부로 만졌다가는 완전히 망가져서 아예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따라서 초보의사인데다가 겁도 많은 나는 그저 진료 보조 역할 외에는 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진료 보조로서도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어졌으니 숙련된 치과위생사가 한분 참여를 해 주셨고 무엇보다 처음 가본 진료실에 필요한 물품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기 힘든 것은 자명한 사실이기에 이래저래 진료에 도움은 고사하고 큰 덩치 덕분에 진료팀 동선만 방해하는 존재가 되었으니 일요일 아침부터 신세 참 처량하게도 됐다.
좁은 진료실에서 할일 없이 계속 있기도 힘들고 눈치 보여서 조용히 복지관 내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다녔다. 제법 이른 시간인데도 어르신들이 많기도 하구나. 신문을 보시는 분, 당구를 치시는 분,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분들. 웬만한 관공서 크기의 큰 건물이지만 이미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좁아 보인다.
어차피 밖이나 안이나 있을 자리 없기는 마찬가지라고 투덜거리면서 진료실로 돌아가려는데 한쪽 구석에서 큰 소리가 났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할아버지 두 분이 싸우고 계셨다. 제일 재밌는 것이 불구경하고 싸움구경이라고 했던가. 직접 나서서 말릴 입장도 못 되고 하니 그냥 물끄러미 서서 바라보니 할아버지들 싸움도 우리들 싸움이랑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너 임마, 내가 누군지 알아? 이전 같으면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자식이."
“야 이놈아 말조심해, 내가 젊었을 때 같으면 넌 나한테 말도 못 부쳤어."
대학생 시절 술자리에서 시답잖은 시비가 생기면 점잖은(?) 체면 탓에 서로 때리면서 싸우기 힘들 때 흔히 하는 것이 한때 자신이 좀 놀았음을 과장하면서 상대에게 겁을 주는 것이었다. 한때 유행했던 ‘17대 1로 맞짱을 떠서’ 같은 것이 대표적으로 이럴 때 쓰는 허풍이다.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도 싸우는 모습이 우리랑 비슷한 것을 생각하니. 언젠가 드라마에서 들었던 “늙은이는 다른지 알아? 지금 예뻐지고 싶어 하는 니들 마음 고대로 나이만 먹는 거여, 이 년들아!" 라는 대사가 떠올랐다.
급하게 달려와 두 분을 뜯어 말린 직원이 못 보일 꼴을 보였다는 듯 한 표정으로 짧게 해명 아닌 해명을 했다.
“일요일은 식권 개수가 조금 적기 때문에 헛걸음 하실까봐 다들 예민하세요."
이런……. 이래서 이 사회를 내일이 없는 사회라고들 하는 구나. 딱 집어서 말하긴 어렵지만 뭔가가 잘못 돼도 한참 잘못 됐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오셨을 인생. 저 분들이 내 나이 때 오늘 점심 한 끼를 위해 체면도 권위도 잊고 소리 지르며 싸울 것이라고는 상상이나 하셨을까. 걸핏하면 나라 탓 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지만 그래도 할아버지들의 힘든 오늘을 개인의 나태와 잘못된 선택 탓만으로 돌리며 외면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밝고 선명하게 이글거리면서 아픈 상처와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까지도 모두 들어내 버리는 한낮보다는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감싸주는 해질 무렵의 빛이 더 아름다운 법이다. 그렇다면 우리네 인생도 황혼녘에 더욱 아름다워야만 할 텐데…….
어쩌면 할아버지들이 싸워서라도 얻고 싶으셨던 것은 단순한 식권이 아니라 여기서 만큼은 밀려나고 싶지 않다는 마지막 자존심과 나 아직 죽지 않았다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존재의 증명은 아니었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 아버지의 흰 머리에 자꾸만 눈이 간다.
이승훈
이수백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