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0번째
영혼을 자극받는 상처가 없기를
진료가 없는 주말 아침, 인기척이 드문 교수 연구동 복도를 지나 연구실 문을 열면 평화로운 적막감이 감싼다. 높은 하늘과 나무들이 보이는 창가에서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 다행히 큰 일 없이 지나왔다는 안도감이 든다. 감사한 일이다. 청년 시절에는 아무 일이 없는 하루가 꽤나 지루한 일상으로 여겨졌을 텐데, 중년이 되어 느끼는 ‘아무 일 없음’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며칠 전 수학여행을 떠난 딸아이는 아무 일 없이 오늘 집에 도착하기를 바라고, 연구실 책상 한 쪽에 있는 액자의 사진에서 웃고 있는 젊은 제자들은 아무 일 없이 열심히 공부하며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성장하기를 바라게 된다. 또한 결혼하여 20년을 같이 한 아내와도 아무 일 없이 오래도록 같이 지내기를 바라는 것은 비단 팔불출만의 희망 사항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간혹 사회에서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의 뉴스를 접하면 오늘의 무사(無事)는 하찮은 시간의 흐름으로 전락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렇게 성공을 이룬 사람의 화려함 뒤로는 의외로 충격적인 사건들이 가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지금은 누구나 선망하는 회사를 일군 한 CEO는 한창 미래를 꿈꾸며 일을 시작하던 어느 날, 택시를 타고 가던 아내와 자녀 둘이 교통사고를 당해 결국 사랑하는 자녀 둘을 잃고 말았다. 그의 나이 서른 살이었으니 젊은 아버지로서의 고통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자식이 죽으면 땅에 묻지 않고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그는 그 사건 이후 미친 듯이 자신의 일에 매달려 열정을 쏟아 부었으며 그의 회사는 승승장구했다. 당시를 회상하며 그는 ‘돈을 벌려는 것보다 가족을 잃었다는 고통을 잊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라고 술회한다. 이제는 새롭게 자녀들을 낳아서 행복한 가정을 다시 이루게 된 그이지만 평생을 안고 가게 될 떠나간 자녀들에 대한 기억은 그의 업보로 남아있을 터이니, 그의 성공의 일부는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극심한 고통이 그의 영혼을 자극해 평범함을 뛰어넘게 된 데 일부 기인할 수도 있겠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는 개인적인 상처를 딛고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드물지 않게 접할 수 있다. 또한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천재들의 개인사는 얼마나 힘든 우여곡절이 많던지….
오늘처럼 마주하게 되는 넉넉하고 평화로운 아침이면 이 글을 쓰는 나를 포함해 주위 인연이 닿는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고통으로 인해 영혼을 자극받는 일이 없기를 간구하곤 한다.‘평범한 일상이 주는 축복과 감사’는 어쩌면 우리가 위대하다고 여겨지는 일들보다 훨씬 더 소중해 매일 가슴에 새겨야 할 금언일지도 모른다. 결혼하여 아이들을 키우며 바람 잘 날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 녀석들이 멀쩡하게 건강히 크고 있어서 이런 일들도 생기는 것이니 그저 감사한 일일 것이다.
요즘은 주위에 뛰어난 사람을 보거나 접하게 되면 내가 그렇게 되지 못하는 무능력에 대한 한탄, 질투와 선망 대신 그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기쁨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도 어쩌면 중년이 되어 가지는 귀한 지혜일 수 있으리라.
문득 다시 고개를 들어 연구실 창밖의 나무들을 바라다본다. 저 나무들은 자라다가 어느 순간에는 성장을 다하여 큰 나무는 큰 나무대로 작은 나무는 작은 나무대로 이렇게 화사한 계절에 푸른 잎을 올리고 각자 고유한 아름다운 생명으로 서 있듯이 우리 또한 어느 시기가 되면 멈출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고, 그 순간 주위를 둘러볼 때 사랑하는 가족들과 지인들이 아무 일 없이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며 행복이라는 것을 믿는다.
김 영 호
삼성서울병원 교정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