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평 나들이
백로가 지난지 며칠이나 되었다.
차창 밖 풍경이 조금씩 변하고 도로변 논밭에는 가을이 조용히 다가서고 있었다.
올해는 유난히도 강원도로 여행을 많이 간다. 오후에는 많은 비가 올 것이란 예보와 추석 벌초 차량이 많을 것이란 이런저런 당일여행으로 별로 달갑지 않은 소식들 뿐이다.
하지만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섰다.
용인쯤에서 밀리기 시작한 차선이 이천까지 가다 서다를 반복하자 옆자리 아내가 되돌아가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그 말에 응하지 않고 ‘오늘은 꼭 봉평을 가서 이효석 선생하고 한잔 해야지. 잔소리 좀 그만하지…’ 하자 이내 아내의 표정이 메밀껍질처럼 까실해졌다.
획 토라진 모습을 한두해 보아 온 것 아니라 걱정하지 않는다. 자기가 좋아하는 상황이 오면 먼저 말을 걸어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원주를 지나면서 차는 원하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우거진 숲 시원한 가을바람에 기대어 비를 잔뜩 품은 구름이 산맥에 걸쳐있다. 장평 IC를 지나 봉평으로 들어서면서 국도 주변 장평천 옆으로 메밀꽃이 가득했다.
장평천의 거친 물소리와 저 멀리 봉평의 하얀 메밀밭이 내 시선 가득 다가서고 있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란 단편소설이 이 산골마을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구나, 예술이 위대 하구나 다시금 생각했다.
몇해전 오스트리아 여행을 했는데 온 관광지가 모차르트로 과대 포장되어있는 느낌을 받았다. 조그만 흔적도 발굴해 알리는 그들이 얼마나 예술가를 귀하게 대접 하는가를 알수 있는 대목이다.
어느 마을의 군수, 지사가 자기의 업적을 당대에 알리기 위해 공적비를 세우다 여러 사람으로부터 조롱을 당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아무도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 이름 석자. 역시 예술은 정치보다 한참 위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봉평 삽다리를 건너보니 걸을 때마다 출렁거리는 감촉이 참 좋았다. 그 옛날 농군이 지게지고 이런 다리를 건널 때 무거운 등짐이 한결 가볍게 느껴졌을 것이고 주막에서 주모가 따라주는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 메밀묵 한 덩이를 먹고 툇마루에 벌러덩 누워서 고된 노동의 피로를 풀었을 생각을 하니 나의 발걸음도 메밀밭을 가로 질러 어느 음식점에 도착해 메밀묵, 메밀전병을 청했다.
아쉬운 것은 운전 때문에 좋아하는 막걸리 한 되 먹지 못하고 나서는 게 내심 섭섭하였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해주던 메밀수제비를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 맛이란 불 켜는 양초 씹는 맛하고 똑같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식었을 때 소금 간하면서 조금씩 먹으면 그래도 먹을 만했다. 지금은 웰빙식으로 인기가 있고 여러 가지 다른 재료를 첨가해서 졸깃하지만 그 예전 가난한 촌부들이 옥수수 감자, 메밀 등으로 연명해야 했을 땐 얼마나 서러웠을까.
아마도 이효석 선생도 그러한 유년기를 거쳐 갔다고 생각했다.
이효석 문학관을 들러서 이것저것 관람하고 옆 메밀밭 비탈을 내려서니 한줄기 소나기가 퍼 붙기 시작했다.
쉽사리 그 칠 비는 아니었다. 금당계곡으로 차를 몰고 빗줄기 세찬 가을 길을 이승재란 가수가 불렀던 ‘아득히 먼 곳’을 들으며 아주 천천히 천천히 거센 빗줄기를 감상하면서 집으로 향했다.
찬바람 비껴 불어 이르는 곳에 마음을 두고 온 곳도 아니라오
먹구름 흐트러져 휘도는 곳에 미련을 두고 온 곳도 아니라오
아 아 어쩌다 생각이 나면 그리운 사람 있어 밤을 지새고
가만히 생각하면 아득히 먼 곳이라 허전한 이내 맘에 눈물적시네
윤양하
서울 한울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