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향기 그득한 문경에서의 하루
-서여치 가을기행을 다녀와서-
드디어 그날이 되었다.
나도 아이들도 ‘제발 비가 안와야 할텐데’라고 기도하던 날 ; 바로 서울여자치과의사회(서여치)에서 가을기행을 가는 날이다. 준비하고 신청받고 하면서 기대반 걱정반이었던 10월, 막상 전날 밤에 내일 아침 6시로 알람을 맞추면서 초등학교 때 소풍가기 전날처럼 오랜만에 가슴이 콩닥거려서 괜스레 7살짜리 막내한테 슬그머니 부끄러워지고….
새벽부터 식구들을 일제히 깨워 세수시키고, 오늘 기행을 위해 전날 밤을 우리집에 와서 보낸 큰아이 친구까지 함께 출발장소로 향했다. 평상시엔 똥침을 예닐곱번 날려도 일어나지 않던 애들이 가을기행 늦는다는 소리 한마디에 부스스 각자 방에서 나오는걸 보고 가끔 써먹어야겠다는 얕은 웃음으로 그날 아침 나의 가을기행은 시작되었다.
이른 출발시간이라 혹시라도 늦게 오시는 분이 있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모든 회원들이 정시에 다 도착하셔서 역시 치과의사들의 높은 교양수준이 입증되었고 오랜만에 만나 함께 여행가는 10년지기 20년지기 동창들의 정겨움이 두 버스를 가득 채웠다.
이른 아침 오시느라 혹시라도 허기졌을까 서여치에서 마련한 김밥, 떡 등의 간식을 모두 맛있게 먹으며, 오랜만에 세미나장도 병원도 아닌 곳에서 직원들과 동문들과 바라본 차창밖으로 지나가는 가을을 가득 머금은 10월은 그동안 집하고 병원하고만 왔다갔다 하던 닥터 지바고였던 내게 신선한 일상의 탈출 그 이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2시간여를 시원하게 달려 도착한곳은 문경! 솔직히 태어나 처음 와보는 이 도시는 한창 사과축제 중이었고 우리는 그 축제의 장을 지나 문경새재에 발을 디뎠다.
옛날 과거보러 가던 선비들이 넘었다던 문경새재에는 그동안 우리가 TV에서 즐겨보던 사극들의 촬영지가 있었고 아이들은 이곳 저곳 이 집 저 집 들여다 보며 오랜만에 아래층 눈치보지 않고 쿵쿵 뛰어다녔고 촬영용 모형 광화문 앞선 서울인양 사진도 찍었다. 한옥의 낮은 처마와 붉고 푸른 기와가 문경의 파란 하늘과 묘하게 뿜어내는 가을정취가 온 얼굴로 마음으로 스며들었다. 맨발로 걷는 길이 유명한 이곳에서 맨발까진 자신없고 양말을 신은 채 걸어보며 여기저기 너무 발바닥이 아프면서도 시원해서 자꾸 걷다가 다음날 진료실에서 종아리가 아파 혼났다.
점심식사 후엔 아이들이 그렇게도 기다리던 사과따기.
문경에 들어서자마자 양 길가로 가득 과수원마다 사과가 주렁주렁 이었는데 생각보다 사과나무는 크지 않아 오히려 아이들도 혼자서 잘 딸 수 있었다.
집에서는 껍질과 속을 다 이쁘게 깎아 주어야 한 조각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아이들도 가지에서 사과를 따서 바지에 쓱쓱 문대고 그냥 와삭 와삭 몇 개를 먹었는지.
치약광고에 나오는 소리처럼 와사삭 소리를 내며 입안에 퍼지는 사과 향은 음~ 정말 달콤하면서도 상큼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마침 그날이 문경주민들의 체육대회 날과 겹쳐서 큰 과수원을 섭외하기 힘들어 걱정했는데 사과향기 만큼은 일품이었고 아이들도 집에서 흔하게 먹던 사과를 여기서는 8개만 가져갈 수 있다고 하니 애지중지하면서 농사지어 먹는 보람과 고마움을 가슴으로 체험한 하루였다.
사실 병원에 환자가 넘쳐나는 것도 아닌데 잠시라도 병원을 마음 편히 비우고 가까운 여행도 다녀오지 못하는 것이 우리 개원의들이 아닌가. 비록 이날은 짧은 하루의 소요였지만 진료실에서 쌓였던 묵은 가슴의 찌꺼기들을 문경 가을들판에 날리고 열심히 일했던 그동안의 보람과 우정을 달콤한 사과로 한아름 안고 돌아온 추억의 가을기행이 되었다.
박현주
서울 주치과의원 원장
서울여자치과의사회 섭외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