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23번째
입 영 여 행
“아빠, 대학교 1학년 마치고 군대 갔다 와야겠어요.”
아들 입에서 벌써 군대 이야기가 나온다. 그만큼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말이겠지? 휴우….
이러다가 몇 해 지나면 장가가고 곧바로 할아버지 말 나오는 건 아닌지…
“군대라~~ 음 다녀 와야지.”
어떤 때는 가끔 지금도 군인 아저씨란 표현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데 아들이 입영이라니… 입영 날짜를 2주 정도 앞두고 아들과 뭘 할까 생각하는데 아내가 아이하고 군대 가기전에 말 좀 많이 하란다. 그래 그동안 병원에 회사에 정신없이 사느라 아들하고 깊은 대화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것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작심하고 술, 안주 준비하고 아들을 불러 앉혔다. 무슨 말을 하지? 군대이야기? 솔직히 군대 생활이라고는 영천 3사관학교와 군의 학교 통틀어서 3개월이 전부인데 딱히 군대란 이런거다 라고 별로 할 말도 없다. 애써 화산 유격장 이야기를 부풀려 해보지만 별로 먹혀 들지 않는 눈치다. 여자 친구 이야기? 미래이야기? 좀 어색하다. 아들과의 진지한 대화가 어색하다니… 내가 이런 아버지가 되어있었구나… 일단 술만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취해서 골아 떨어졌다.
여행을 가자! 마침 구정 연휴가 있어 시간도 좀 낼 수 있고…그런데 부모님은 어쩌나? 아버지께 전화를 건다. “찬영이 군대 가기 전에 함께 가족여행 한번 다녀 오고 싶다”고 죽어 들어가는 목소리로…말이 채 끝나기 전에 아버지가 말씀 하신다 “그래 잘 생각했다 좋은 데로 가서 잘 놀다 와라” 이말 정말로 믿어도 되겠지?
아들에게 어디를 가고 싶은지 물었다 몇 년 전 일본 사뽀로로 스키타러 갔던 일이 너무 좋았단다. 갑자기 결정된 일에 비행기표가 있을지… 부랴부랴 여기저기 알아보지만 역시나 설 연휴에 일본행 비행기표 구하기는 하늘에 별따기. 두 번째 가고 싶은 곳은 남도 여행. 결정하고 무조건 떠나기로 마음먹고 숙소정하고 설 귀성 현황 인터넷으로 보면서 고속도로 풀리는 것 눈치 보다가 새벽 4시에 전남 해남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아뿔사 이렇게 인터넷 들여다 보다가 출발한 사람들이 우리뿐 일거라 생각하다니….
도로는 꽉 막혀 버리고 이리저리 덜 막히는 곳을 찾아 방향을 계속 바꾸다보니 멀리서 동이 터 올 때 쯤 우리는 충남 예산 고향집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뒷좌석에서 잠들어있던 아내가 깨어서 한마디 한다.“아버님 농장 근처인데 잠깐 들렀다 가죠?” 이런 기특할 수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부모님께 들러 이른 아침을 얻어먹고 마치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들른 것 처럼 착한 아들 역할 잠깐하고 용돈 찔러 드리고 다시 남도로 향했다. 아들 운전시키고 뒤에서 졸면서 그렇게 달린지 5시간 만에 해남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설 연휴에 문을 연 음식점이 보이질 않는다. 여행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 지방 맛집 찾아다니는 것인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그것도 맛의 고장 전라도에서…
어찌됐든 기억에는 많이 남겠다 위로하면서 민생고 해결방안을 찾아 보는데, 멀리 한우고기 파는 정육점이 보인다.
다행히 첫날 숙소는 휴양림 내 펜션이라서 밥해 먹을 수 있는 도구들은 어느 정도 준비 되어있었다. 등심 구워 먹으며 포도주도 한잔….
다시 아들과 대화를 시작, 우선 작은 농담하나 건넨다.
“너 같은 아이들만 모아놓았을 텐데 우리나라 걱정된다” 대꾸가 없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아빠 군대 얘기 말고 다른 이야기 하죠.”
자기 나름대로는 이런 말이 스트레스인가보다. 일단 후퇴다.
“앞으로 뭘 하고 싶으냐?” 진지한 질문이다.
“경영학을 부전공으로 공부해 보고 싶어요” 뜻밖의 대답이다. 전자전파공학을 전공하는 아이가 경영학을 하고 싶다니?
전공과 함께 경영학을 공부해야 나중에 자신의 사업을 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논리다. 아이는 내가 모르는 사이 나름대로 미래를 구상 중이었다. 조금씩 아이의 입이 열린다.
그렇지, 내가 생각했던 입영여행의 시작이다.
그날 저녁 나는 아내가 잠든 침대 옆에서 아들과 많은 대화를 했다.
얼마 전 여자 친구와 헤어졌던 이야기, 결혼관에 관한 이야기, 군대에서 꼭 해보고 싶은 일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군대 가면 경영에 관한 책을 2주에 한권씩 보내 달라는 부탁 등등
술술 잘도 나온다. 이런 대화를 좀 더 자주 할 것을….
처음에 꺼내 놓았던 작은 농담이 점점 믿음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한참을 이말 저말 하다가 아들이 갑자기 놀란다.
“아빠 내일은 우리 뭘 먹죠?”
“내일은 진짜 설날인데 하 하 하”
그렇게 입영여행은 2000km를 달리고, 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남긴 채 막을 내렸다.
여러분들도 아이들하고 대화 많이 하시기를….
어느날 갑자기 아이들이 곁을 떠난다고 할 때 당황 하거나 어색하지 않으시려면….
정영복
정영복치과의원 원장
동작구 치과의사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