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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5번째) 약한 여자 그리고 강한 엄마

약한 여자 그리고 강한 엄마

  

오늘따라 까다로운 환자들이 많다. 진료를 마친 환자가 나한테 와서 자꾸 진료비를 깎아 달라고 한다. 안 그래도 오전에 미열이 있던 아들 준서 생각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운데 환자마저 날 안 도와준다. 결국 진료비 깎아 달라던 환자는 이렇게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나니 그제야 병원 문을 나간다.


환자 대기실을 보니 아직 몇명 정도는 더 있는 것 같다. 원장님이나 스탭 모두 정신없이 움직인다. 진료실, 리셉션 테이블에서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어느새 많았던 환자들이 하나 둘 사라져간다. 이제 좀 쉴 수 있을까?


잠깐 환자가 뜸한 시간에 창밖을 바라보면서 잡념에 휩싸인다.
이 같은 잡념을 하게 된 이유에는 오전 준서의 미열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준서 엄마로서, 내 남편의 와이프로서, 시댁의 며느리로서, 치과의 치과위생사로서 “주어진 내 삶에 역할에 최선을 다 하고 있어!”라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다면서도 그들한테 미안한 감정은 무엇일까? 이것이 한국 사회에서 직장맘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자화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 같은 직장맘들은 다 그렇게 살겠지라는 생각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뇌리를 스치는 동안 또 한명의 환자가 들어온다. 치과위생사로서 경력이 어느 정도 되나 보니 들어오는 환자 인상만 봐도 대충 느낌이 온다. 이 환자 힘들 것 같다.
정신없이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니 오전에 미열이 있던 준서가 더욱 보챈다.
남편은 나름대로 일찍 집에 귀가하는 날엔 집안일을 거든다고 하지만 모든 집안일은 내가 귀가해야 마침표를 찍는다. 역시 남편들이 집안일을 도와주는데 한계가 있나보다.


남편은 준서를 안고 있다 내가 집안에 들어오자 바로 애를 맡긴다. 옷 갈아입을 시간을 줘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서운한 감정도 잠시 잠 트집이 생겼는지 어김없이 잠투정을 하는 준서. 미열 때문에 더 그러는 것 같다. 참 애매하다. 약간의 미열이 있는데 이걸 가지고 병원에 가기도 그렇고 안 가자니 오늘 밤이 더 힘들어 질 것 같다는 생각에 머리가 잠시 혼란스럽다. 며칠 전 소아과 갔을 때 받아 놓은 약을 좀 먹이고 겨우 애를 재웠다. 수면등 아래 잠든 모습에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울컥 눈물이 나온다.


이런! 오늘따라 주책이다. 엄마 생각도 난다. 울 엄마도 날 이렇게 키웠겠지?
준서를 낳고 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준서를 낳기 전에는 그나마 친구들과 때로는 남편과 커피숍에서 커피 한잔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정신적, 육체적 여유가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다. 쉴 새 없다.


그나마 만만한 남편한테는 “나 같은 강골이니까 이 정도 하는 거라고!” 씩씩하게 얘기하고 때로는 가끔씩 기대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남편의 상황도 그리 녹록치 않을 것 같아 그냥 생각만 한다.


직장맘으로서의 삶이란 나름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누구한테도 칭찬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신문 기사에서의 글귀가 오늘따라 더욱 뇌리를 자극한다. 미열이 있는데도 직장에 나가면서 이젠 제법 엄마를 알아보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준서 떼어놓고 갈 때 느낌은 조금 덜 쓰고 덜 먹으면서 살면되지 그만 둘까?라는 생각을 잠시 하게 되지만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가는 준서를 보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할 일이다. 또 잡념이다. 애 재우러 갔다가 너무 조용해 방을 들어오는 남편이 넋 나간 표정으로 준서를 바라보는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본다.


애를 재우고 나서 또 집안일 2부 시작이다. 늦은 시각이지만 어쩔 수 없이 세탁기를 돌리고, 반찬거리를 준비하고, 설거지하고 집안일이 끝나니 새벽 1시가 넘어가고 있다.


남편이 잠을 안자고 기다린다. 넋 나간 표정이 마음에 걸렸나보다. 서로 이것저것 얘기를 한다. 준서 얘기, 앞으로 살아갈 얘기, 그나마 얘기를 하고 나니 조금 후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몇 년간 이런 시간들의 연속이겠지? 다시 한 번 준서의 잠든 얼굴을 보면서 체온을 재니 열이 이제야 떨어진 것 같아 다행이다. 약을 먹어서인지 저녁보다는 한결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다.


누가 그랬던가? 잠든 아기들의 얼굴이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다고. 잠든 준서의 모습을 보니 또 하루의 피로가 상당부분 씻겨 나가는 듯하다. 잠든 준서가 마치 나한테 이렇게 얘기하는 것 같다. “엄마 잘 할 수 있어요. 파이팅!!!” 힘이 난다.


누가 그랬던가. 여자는 약하나 엄마가 강하다고.  

  

홍문수

푸른치과의원 치과위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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