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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63번째) 내 기억 속 영화와 클래식 음악 (상)

내 기억 속 영화와 클래식 음악 (상)

  

지금은 개인적으로 시간이 없어 영화를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9년전 어느 시골에서 공중보건의를 시작했을 때, 밤에 홀로 관사에 남아 영화를 볼 기회가 많았다. 그 안의 다양한 군상들이, 나는 살아보지 못할 삶의 이야기를 풀어낼 때면 그 속에서 간접 경험이나마 거듭 환생할 수 있었고 그들의 마음이 되어 보고자 했었다. 그러던 중 너무나 좋아하던 클래식 음악이 영화 속에서 흘러나올 때면 나만의 은밀한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기뻐하며 그 때의 감정을 메모로 남겨두곤 했다. 시간은 벌써 이만큼 흘러갔고, 찰나의 휴식 중 우연히 꺼내어져 놓인 기억의 편린을 발견하여 그 작은 못 속에 지그시 발을 담그며 추억에 잠겨보고자 한다.

  

1) Band of Brothers(2001)와 Beethoven String Quartet #14 in c minor Op.131
6부에서의 의무병의 활약, 9부에서의 참혹한 유태인 수용소, 10부에서의 히틀러 알프스 별장 등이 특히 인상 깊었는데, 9부 초반에 흘러나오는 허망하면서도 구슬프게 연주되는 실내악곡이 바로 베토벤의 현악4중주 제14번이다.
이 곡은 총 7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나마 모든 악장을 거의 쉬지 않고 연주하도록 되어 있다. 여기서 베토벤의 파격적인 면모를 볼 수 있는데, 그의 총 16곡의 현악4중주곡 대부분이 4악장으로 되어 있지만, 후기 작품은 작곡 순서대로 볼 때 제15번이 5악장, 제13번이 6악장, 그리고 이 곡 제14번이 7악장으로 악장 수를 하나씩 늘려나가고 있다.
생애 말년을 맞아 점점 하고 싶은 이야기(악상)들이 많아서 였을까, 혹은 이제 회고적으로 과거의 열정을 술회(述懷)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떠나버린 천재의 명곡이 전쟁으로 재만 남아버린 폐허를 배경으로 흘러나올 때 느끼는 영화 속 감동 위로 거장의 충만한 만년을 투영해 본다.(2004.5.12.)

  

2) The Human Stain(2003)과 Schubert String Quintet in C major
인생을 마감해가는 역할로 나오는 콜먼교수역의 안소니 홉킨스와 연인 니콜 키드먼이 교회에서 감상하는 실내악 연주장면이 나오는데 슈베르트가 죽는 해에 완성한 String Quintet in C major의 2악장 후반부이다.
슈베르트는 만 31세에 사망하는데, 역시 후반부에 작곡한 곡일수록 훌륭한 곡이 많은 것 같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곡은 전반적으로는 다소 밝은 느낌이나, 2악장만 의미심장하면서도 삶에 초연해지는 풍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본 영화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느낌이다.
베토벤이나 브람스도 현악5중주곡을 두 곡씩 썼는데, 이분들의 경우 비올라를 2명 쓰는 구성이었으나, Schubert는 첼로를 2명 쓰는 구성으로 하고 있다. 덕분에 바이올린과 첼로의 수적 균형이 맞으면서 비올라 1명이 가교의 역할을 해주는 느낌이며, 곡의 느낌도 보다 무게 있고 깊이 있게 들리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역시 2악장이 가장 좋은 것 같다.(2004.5.10.)

  

3) 불멸의 이순신(2004)과 Anton Bruckner Symphony #7 in E major
한국 사극에서 클래식음악을 듣게 되다니…하는 놀라움! 정확하지는 않지만, 나왔던 곡들로 기억나는 것은, Rudolf Barshai가 Shostakovich string quartet #8을 chamber symphony로 편곡한 것, Prokofiev의 ‘Alexander Nevsky" op.78의 서주부분(전함 포템킨의 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영화음악)과 ‘Scythian suite" op.20이 있었고, 고뇌하는 이순신의 비장한 모습 뒤로 조용하면서도 묵직하게 나오는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 2악장을 특히 잊을 수 없다.


브루크너는 25세 때 첫 곡을 작곡한 이래 50세에 제2교향곡을 발표할 때까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는 이 교향곡 7번을 초연한 60세가 되어서야 겨우 인정을 받은 대기만성형의 작곡가였다. 또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며, 검소하면서도 고난의 길을 걸어왔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인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브루크너는 평소 바그너를 경애했는데(교향곡 3번을 바그너에게 헌정하여 바그너 교향곡이라 부르기도 한다.) 잘 아시겠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바그너는 딴 살림과 야반도주의 대가가 아닌가. 어쨌든 7번을 작곡할 당시 존경하는 바그너의 죽음을 직감하여 이를 애도하고자 했는지 2악장의 제1주제가 튜바를 중심으로 하는 엄숙한 장송풍 음악으로 시작된 후 현의 저음부로 반복되는데, 바로 이 부분이 드라마 중에 흘러나오는 비장한 음악이다.


임진왜란을 위해 태어나 죽은 이순신과, 신앙심과 검소함을 갖춘 대기만성의 수도자 브루크너, 그리고, 자신이 충성을 다 바친 인물에 대한 애도의 노래가 결국은 브루크너 자기 자신과 그 분신으로 보여지는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위한 진혼곡으로 일체화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흔들림없이 조용하면서도 묵묵하게 자신들의 길을 걸어간 이들의 뒷모습을 언젠가는 나도 닮고 싶다는 소망을 가져본다.(2004. 9. 21)
 <다음호에 계속>

  

현홍근
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소아치과학교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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