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등
어렸을 때 방학이나 명절이면 항상 할머니 댁에 가곤 했다.
딱히 휴가라 할 것 없이 할머니 댁 개울가에서 고기 잡고 뛰노는 것이 바로 휴가였다.
하지만 그 곳에 가는 것은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다. 할머니 댁은 지금은 사라진 비둘기호 기차를 타고 완행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만 되는 지리산 노고단 산골짝이었다.
어느 신정 연휴 때 할머니 댁에 가는 길에 폭설이 왔었다. 아련한 기억이지만 아직도 그 때 처럼 눈이 많이 온 걸 본적이 없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아버지 키보다 더 많이 왔었던 걸로 기억한다. 버스가 더 이상 가지 못해 중간에 그냥 내려야 했는데 동생까지 우리 네 식구는 조난자가 되었다. 가장 가까운 인가도 한참을 가야 하는 첩첩산중이었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날 업으시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을 가슴에 폭 감싸 안은 채 행여 눈이라도 맞을까 큰 우산이 되어 천천히 걸어가셨다.
온 천지가 하얗고 매서운 바람이 살을 애던 그 날, 난 아버지 등에서 편안히 흔들흔들 거리며 스르르 잠이 들어 버렸다.
아마도 그 순간은 평생토록 가장 따뜻하고 평온한 순간으로 기억될 것 같다.
요즘은 엄마들이 아이를 등에 포대기로 업고 다니는걸 보기가 힘들다. 포대기에 업으면 O자 다리가 된다고 대부분 아기띠나 슬링, 유모차를 이용한다.
하지만 예전에는 어머니들이 아이를 포대기에 둘둘 싸서 등에 업고 다녔다. 응석쟁이 녀석들은 심지어 학교에 입학해서도 어머니께 업어 달라고 졸라대는 녀석들도 있었다.
요즘은 왠지 그 포대기 생각이 난다.
아버지의 따뜻한 등에 업혀 아무 걱정 없이 잠들어본 시간들이, 어른이 되어 버리고 그리고 개원을 하고 병원을 운영해 나가면서 문득문득 그리워진다.
경영 환경이 그래서이건 개인적인 성향이 그래서이건 늘 쫓기고 불안한 맘이 없어지지 않는 때이다. 아직 개원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더 그런지 모르겠지만 주위 선후배 원장님들을 뵈어도 다들 어려운 때라 말씀들을 하신다.
수많은 마인드 콘트롤 서적이나 방법들이 소개되고 체험코스도 등장하고 있지만 도시 속에 사는 현대인들 그리고 우리들이 어디 한번 정말로 맘이 평온한 적이 있을까? 그 옛날 아버지의 등처럼 어머니의 품처럼 두려운 것 없이 평온하게 병원을 가꾸어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한 건 왜 일까.
더불어 진료실에서 환자들에게 아버지의 따뜻한 등같은 의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환자분들과 인간적인 관계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그러기까지가 너무나 힘들어졌다. 또 그러한 관계만으로는 병원의 경영이 어려운 시대가 된 것이 사실이라 환자들과의 관계가 점점 삭막해지는 것 아닌가 싶다. 거기에 내부구성원끼리의 다툼으로 상처받고 일반 국민들로부터는 자기들만의 밥그릇 싸움으로 비난받아 갈수록 힘들어지는 것이 요즘 우리 치과인들의 모습이다. 그래서 그나마 남아있던 조그만 자긍심마저도 사라져 가는 것 같아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도 어릴 적 아버지의 포근한 등을 떠올리며 환자분에게 먼저 다가가려 노력해야겠다. 아침에 창밖의 맑은 하늘을 보면서, 그리고 “고맙습니다” 배꼽인사 하는 앞니 빠진 아이를 보면서 어린 시절 아버지의 등처럼 따뜻한 치과의사로 남기를 기도해 본다.
정민
서울 예이랑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