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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94번째) 新 風水地理 (1)

新 風水地理 (1)

  

얼마 전 요즘에도 각종 풍수지리가 횡행한다는 신문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원래 동양에서는 오래전부터 집터나 묘 자리 등을 볼 때 풍수지리설을 널리 신봉해 왔지만 서양에서도 궁전이나 성채, 성당 등을 지을 때 전망 좋고 양지 바르며 홍수와 태풍에 안정된 위치를 고르고 선호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예부터 이름난 명당자리라는 ‘좌청룡 우백호’도 알고 보면 바람 안 들이치고 양지 바르며 홍수에 떠내려가지 않는다는 자리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컴퓨터 시대인 요즘 들어서도 빌딩이나 사무실의 위치뿐만 아니라 실내 집기류 배치에 이르기까지 온갖 액운을 피하기 위해 풍수지리를 신봉한다는 소식이다.


 재벌가문의 묘 자리 선정이 온 고을이 시끄러운 행사라는 얘기는 숱하게 들어왔지만 주인이 바뀔 때마다 명동 모 은행 지점장실의 집기류들을 동서남북으로 옮겨가며 소란을 떤다는 기사이고 보니 돈 장사를 하면서 무던히도 마음에 걸리는 일들이 많았나 보다.


 조선 초기 한양을 도성으로 정할 때도 풍수지리에 의한 영향이 가장 컸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창건한 이듬해인 1393년에 무학대사와 함께 현지를 시찰하고 계룡산 언저리인 신도안(新都安)을 도읍의 후보지로 선정하였다. 이후 일부 도성축조 공사에까지 착수하였으나 중신인 하륜의 강력한 반대에 봉착하여 중단하게 된다.


 하륜은 모악산(母岳山;무악재)을 배경으로 하는 모악 남, 즉 모악산 아래의 연희 벌을 한강이 아늑하게 감싸 안고 흐르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 한양천도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생각했던 곳은 연희동 일대와 그 주변지역이어서 지금의 4대문 안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실은 새로운 왕조를 창건한 이후에도 대부분의 군신들이 개경에 머물기를 원했지만 태조는 안정된 새 왕조의 반석을 마련하기 위해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했다.


 군신들의 입장에서 보면 온갖 식솔들과 가산, 특히 집과 농토를 두고 새로운 도읍으로 옮겨 간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은 골치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개성에 그냥 눌러앉아 있으면 관직이 위태로울 것만은 자명했다.


 어쨌든 신도안 천도가 하륜의 반대로 어려워지자 태조는 개국일등공신인 정도전과 무학대사, 하륜 등의 의견을 들어 한양을 도읍지로 정하되 주례고공기(周禮考工期)로 대표되는 중국 고대도시의 특성과 풍수지리에 입각한 자연사상에 의해 도성을 축성한다는 원칙을 세우게 된다. 이와 함께 예로부터 전해오는 우리나라의 성곽조성양식, 즉 산성으로 대표되는 성곽의 전통도 함께 되살리고자 했다.


 정도전은, 백악산(白岳山)을 주산으로 하고 서쪽에 인왕산(仁旺山), 남쪽에 목관산(木貫山;관악산 왼쪽 앞에 있는 남산)과 관악산(冠岳山)을 바라보는 자리에 도성을 세우되 궁궐은 북북서에 앉아 남남동을 향하게 한다.


 그리고 백두산의 정기를 모은 삼각산과 지리산의 맥박을 이어받은 관악산의 축 뒤에 도성을 위치하게 한다. 즉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정신에 따라 경복궁의 좌측에는 종묘를, 우측에는 사직단을 위치시키려고 했다.


 반면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고 북쪽에 북악, 남에 목관산, 동에 주작산(朱雀山)을 바라보는 위치에 도성을 짓되 정서에 앉아 정동을 바라보는 유좌란향(酉坐卵向)으로 궁궐을 배치하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도성을 축조하는데 태조는 유학사상에 기초한 풍수지리설을 앞세운 정도전의 의견을 중시하게 된다. 정도전은 태조의 일곱째 아들인 방원을 태자로 삼게 했을 정도로 당시의 실세였다.


 지금의 종로구청 자리가 정도전의 사저인 ‘수진궁’자리이다. 신하의 사저가 ‘궁’으로 불리는 것은 역사상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다음호에 계속>

  

김영진
영진치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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