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ay Essay
제1749번째
결 정
우리는 살아가면서 매 순간 크고 작은 결정을 하며 살아간다. 또한 지난 결정에 오늘도 반성하게 되고 후회도 하게 된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최선의 결정도 있었을 것이고 타의에 의한 결정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매 순간의 결정들이 모여 지금의 우리가 있게 되지 않나 싶다.
독일 유학시절 난 처음 지도교수와의 면담시간을 잊을 수 없다. 내가 있던 도시 Aachen은 독일 벨기에, 네델란드 3개국과 인접해 있는 지역으로 내가 유학한 해(1982년) 주위 국가의 환자유치를 위해 유럽에서 가장 큰 병원(Neues Klinikum)을 지었다. 치과대학 주임교수로 오신 Spiekermann 교수는 그 당시 유럽 임플랜트 영역에 Dr.Kirsch와 함께 가장 유명한 교수셨다.
Spiekermann 교수와 첫 면담시간에 ‘독일에 얼마나 있을 계획이냐?’고 물으셨고 이는 나의 독일에서 진로에 대한 결정의 순간이었다. 난 ‘남편이 공부 끝날 때 까지 있을 예정이다’라고 대답을 하고 곧바로 후회해 버렸다. 그 당시 독일엔 동양인이 매우 적었고 한국은 일본 옆에 있는 나라로 설명을 해야 알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런 동양인 여자가 독일 유학 와서 남편에게 종속적으로 이야기하는 동양적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도교수는 ‘이왕 독일에 왔으면 성과를 얻어가는 것이 좋고 임플랜트 영역에서 논문을 쓰려면 생체실험을 거쳐야 하므로 적어도 7년 이상 걸린다. 결과를 확실히 얻을 수 있는 재료학 쪽으로 하면 원하는 기간 내에 좋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끝낼 수 있다’며 재료학교실의 Finger교수를 소개시켜 주셨다.
새로 지어진 병원인지라 치과재료학 실험을 위한 치과기자재가 제대로 갖추어 지지 않아 난 그 당시 많은 치과재료를 생산하던 Bayer 회사가 있는 Leverkusen으로 통학하는 고생의 연속이 시작되었다. 통학거리 5시간, 기차 2번, 버스 3번을 갈아타야만 연구실에 갈 수 있었다. 2년 고생 후 Aachen 치과대학에 치과재료학교실이 제대로 갖추어질 무렵에 난 둘째의 임신으로 박사과정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출산 후 치과대학 병원에서 수련을 하면서 중단했던 논문을 진행하고 있던 차 나의 남편은 학위가 끝나고 한국에서 자리가 정해서 귀국할 수 밖에 없었다. 타의에 의한 결정의 순간이었다. 귀국 후 남편이 대학으로 가게 되었기 때문에 난 공직에 대한 염원을 접고 자녀 교육과 경제적 여건 때문에 집근처에 개원을 하게 되었다. 이 또한 환경여건에 의한 결정이었다.
지난 9월 싱가포르 FDI에서 한 독일 동료로부터 Spiekermann 교수가 아프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몇 달 후 Melanoma 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Finger 교수로부터 전해 들었다. 난 가끔씩 Spiekermann 교수와 면담 때 아주 적극적으로 ‘임플랜트 영역의 나의 의지와 정열을 표명했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한다. 그 때가 1983년이었으니 나의 위치도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고 나의 영역도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나의 또 다른 지도교수인 Finger 교수는 지금 일본에서 교환교수로 접착분야에 많은 우수한 연구를 하고 계시고 지난 3월 일본 GC사 방문시 교수님과 25년 만에 만나뵐 수 있었다. 기회가 닫는다면 같이 연구를 하자는 제의도 해 주신다. 개원의로서 치과재료 연구에 참여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살아가면서 어떠한 결정이든지 또 다른 기회로 이어진다. 나뭇가지와도 같은 인생의 다양한 갈림길에서 어떠한 여건에서든 그 순간의 결정을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김경선
ㆍ전 치협 부회장
ㆍ한도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