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ay Essay
제1752번째
시골 촌 생활의 즐거움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옛이야기는 너무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다. 맹자를 훌륭하게 키우기 위하여 맹자의 어머니가 이사를 세 번 갔다는 이야기이고, 맹자의 어머니가 매우 훌륭한 어머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이야기이다. 처음에 묘지근처에 살았더니, 맹자가 장례 지내는 흉내를 내고, 시장근처로 옮겼더니 물건 파는 흉내를 내서, 글방 근처로 옮겼더니 드디어 맹자가 책을 읽었다는 내용인데, 이 내용만 봐서는 맹모의 훌륭함을 느끼기 힘들다. 단지, 아들 공부 더 시키려는 극성스러운 어머니, 최대로 좋게 보면 헌신적인 어머니 정도밖에는 못 느끼겠다. 정말로 훌륭하고 똑똑한 어머니였다면, 처음부터 글방 옆에 살았거나, 첫 번째 실수 후에 바로 글방 옆으로 갔어야 하지 않았을까? 왜 두 번의 실수를 한 후에 비로소 글방 옆으로 이사를 갔을까?
맹모의 훌륭함은 오히려 얼른 글방 옆으로 가지 않은 것에 있다. 학문을 하는데 적당한 때가 있고, 그것의 기본바탕에 먼저 배워놔야 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먼저 묘지근처로 갔다. 맹자의 어린 눈에 삶과 죽음에 대해 느끼게 해주고(차마 깨닫게 해주었다고는 하기 어렵겠다.) 그런 이후 시장골목으로 이사를 하여 현실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 이후에 비로소 학문을 시작하게 하였던 것이었다.
큰 딸을 키우면서 다른 학부모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무엇을 하면 좋은지, 언제 시작해야 좋은지, 어느 학원이 좋은지 등등 모든 이야기는 새롭고도 좋은 정보들 같았다. 잘 모르는 상태에서는 그저 중간이라도 가자는 생각으로 돈질을 했던 것 같다.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하고 후회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 아이는 영어유치원, 수영장, 바이올린과 피아노, 미술 선생님과 철학 선생님도 부르고 학습지와 인터넷 영어수업까지도 듣게 되었던 것 같다. 하나는 괜찮겠지 하면서 시작된 것이 어느새 어른보다 더 스케줄이 빡빡한 아이를 만들고 있었다.
2010년 7월 갑자기 강화에 있는 치과를 인수하게 되면서 인천에서 강화로 출퇴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멀고 막혀서 힘들기만 했었는데, 가을이 되어 들판과 산의 색깔이 변하는 것을 보면서, 아침 햇살이 바닷물의 일렁거림과 부딪히면서 반짝반짝 거리는 것을 보면서, 너무나 아름답다고 생각이 들었고, 도시에서는 잘 느끼지 못하던 계절의 바뀜에 대한 느낌이 강렬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장면들을 우리 아이들도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곧장 집을 알아봤다.
1959년도에 등기가 난 오래된 집이 있어서 그 집을 사고, 약간의 수리를 하고서 이사를 했다. 집 근처에 삼성초등학교가 있는데, 초등학교 2학년에 3명이 다니고 있었다. 우리 큰 딸이 들어와서 4명이 되었다. 전교생이 30명 정도 되니, 모든 학년이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고, 누가누구인지 잘 알고 지낸다. 수학여행도 전교생이 버스 한 대로 함께 가고, 식당에서 모두 모여 식사를 하고, 식사 후에는 모두 나가서 피구하고 논다고 한다.
인천에서 사립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한 반에 30명이 넘는 교실에서 담임선생님의 관심과 칭찬을 별로 받지 못하였고, 상장 한 장 받아오지 못하였었다. 맞벌이 부모의 탓인가 싶기도 했었다. 시골로 들어와서 학생 수가 적으니, 뭐만 하면 상장을 타온다. 무슨 그림그리기 대회라도 하면, 최하로 받아오는 것이 장려상 같다. 수줍어하고 자신감 없어하던 아이도 점점 활달해 지고, 자신감이 늘어났다.
2학기가 되어 반장투표를 했는데, 여자 둘이서 반장 후보가 되었다. 큰 딸은 ‘나만 올해 전학을 온 것이고, 나머지는 1학년 때부터 함께 다녔으니 나는 0표를 받을 것 같다. 0표를 받으면 창피하니, 내 이름을 쓰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 발표는 계속해서 자기이름이 호명되었다. 마지막 투표용지를 읽기 직전에, ‘제발 다른 친구의 이름이 써 있어야 할 텐데’하고 마음을 졸였으나, 결과는 4:0이었다. 얼른 친구한테 가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고 하였다. 인원수 적은 학급이니 가능한 일화였던 것 같다.
학교생활 이외에 집에서의 생활도 만족스럽다. 아파트에서는 8시 즈음 퇴근하여 10시 즈음 아이들이 잘 때까지, 내가 제일 많이 하던 말은 “뛰지마”였었다. 주택에서는 마음껏 뛰어도 즐거운 마음뿐이니 잔소리 할 것이 없어져서 편하다. 집이 18평정도 되니, 좁은 거실에 모여 4딸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으면, 60평대 아파트에 살 때보다 오히려 더 사람 사는 느낌이 든다. 가족 같은 느낌이 든다. 추운 겨울 담요 한 장에 빙 둘러 발 넣고 앉아있으면 등은 시려도 마음이 따뜻하다.
마당 옆 작은 텃밭에서는 봄부터 가을까지 여러 가지 먹거리가 나오고, 집 울타리 주변의 나무들에서는 계절마다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린다. 날씨가 좋으면 은하수를 보면서 별자리 이야기도 해주고, 마당에 핀 여러 꽃들의 이름을 찾으면서 불러준다.
생활에서의 불편함을 감내할 만큼, 시골에서의 생활은 만족스럽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불안하고, 걱정되기도 한다. 과연 우리아이들에게 이 길이 최선일까 하는 마음이 계속 생긴다. 나중에 대학가기 어렵게 되었다고 원망이라도 듣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요즈음 같은 세상에 맹모가 태어난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글방 옆으로 이사를 가야 할 시기가 언제 즈음일까 하는 고민이 생긴다. 그러나 세상일 모두 다 만족스러운 선택은 없으니, 일단 현재 만족스러운 것으로 위안 삼으며, 촌에서의 생활을 즐겁게 열심히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조남억
강화 신동근치과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