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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59번째) 베르겐에서 들었던 솔베이지의 노래

Relay Essay
제1759번째


베르겐에서 들었던 솔베이지의 노래


“귀한 자식일수록 여행을 많이 시켜라”는 속담이 있다. 이 말은 “귀한 자식일수록 세상의 어려움을 경험하게 하라”는 뜻이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여행은 영혼의 호흡일뿐 아니라 인생을 더 풍요롭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자양분이다.


어느 가을 광화문 교보빌딩에 걸려 있는 <네 곁에 있는 사람 / 네가 자주 가는 곳 / 네가 읽고 있는 책이 너를 말해준다>는 플래카드를 보았다. 교보문고가 독서를 생활화 하자는 취지에서 내건 내용이었겠지만, 내게는 “네가 자주 가는 곳이 너를 말해준다”는 구절이 크게 공감이 되었다.


그 동안 국내 여행도 제대로 하지 못한 나였지만, 여행의 참 맛을 처음 느끼게 해준 곳은 독일 하이델베르그였다. 네카강변에 자리잡은 하이델베르그는 교육도시일 뿐만 아니라 괴테가 한 때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을 나누었던 도시이고, 유학생이던 왕자와 카페에서 일하던 소녀 사이의 사랑을 테마로 한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의 무대이기도 하다. 오래 전 이곳을 여행하는 동안 모처럼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네카강변을 따라 쭉 이어진 도로에서 자전거를 타는 한가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바쁘게 사는 많은 사람들이 다 그렇겠지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조차도 없이 그렇게 젊은 날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내 자신은 물론 주변을 돌아다볼 여유도 없었던 게 사실이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자신에게 갇혀 살았던 것이다. 정작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게 진정 가치 있는 삶인지 생각할 겨를 없이 그저 열심히 사는 것만이 중요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한 삶을 떠나 모처럼의 여유를 즐기며 짧지 않은 삶을 돌아다 볼 여유를 갖게 되었다. 성공회대학 신영복 교수의 말대로 여행은 자신이 갇혀 있던 견고한 성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일 뿐 아니라, 일상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다주는 영혼의 호흡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신에게 너무 완벽을 요구했던 지난 날의 모습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인간이 완벽하게 살 수 있다는 말인가? 좀 더 여유로운 삶을 위해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기로 했다. 덜 충족되어도 만족하기로 했다. 항상 위만 쳐다보는 삶에서 아래도 내려다보기로 했다. 먼저 손을 내밀고, 먼저 말을 걸고, 먼저 웃기로 했다.


이렇게 나에게 주어진 부족한 부분까지도 사랑하게 되자 삶이 훨씬 여유로워졌다. 평소에 관심 밖이었던 작은 들꽃의 아름다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고, 새들의 지저귐이 울음소리가 아니라 노랫소리로 들리기 시작했다. 작은 여울로 흘러드는 시냇물이 정겹고 사랑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영혼의 호흡을 위해 가끔 진료를 쉬고 훌쩍 떠나는 용기를 가져보았다. 어떤 때는 노르웨이 베르겐에서 그 곳 출신 에드워드 그리그에 흠뻑 빠져보기도 했다. 비가 내리는 오후 베르겐의 어느 멋진 카페에 앉아 듣는 ‘솔베이지의 노래’는 내 생애 최고의 선물이었다. 페르귄트의 귀향을 애타게 기다리는 솔베이지의 심정을 노래한 솔베이지의 노래는 집을 떠나 먼 곳에 와 있는 여행객의 감성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꿈을 좇아 헤매던 몽상가 페르귄트는 기쁨과 슬픔이 얽힌 오랜 여정을 마치고 지치고 늙은 몸으로 고향의 오막살이로 돌아오게 되었으나 솔베이지는 백발이 다 되어 있었다. 몸과 마음 모두 지쳐 있던 페르귄트가 오랫동안 자기를 기다려준 솔베이지의 무릎 위에서 평화스런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을 떠올리며 마시던 커피잔을 내려놓고 잠시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먼산을 바라다보며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섬세하고 감성적인 선율이 한동안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기억은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생각나곤 한다.


휴가철만 되면 프라하의 카를교에서 바라본 프라하성의 아름다운 야경과 시원한 강바람, 거리악사들의 멋진 바이올린 선율이 생각나고 창가의 빨간색 제라늄꽃들이 유난히 아름다웠던 스위스 루째른 호숫가의 예쁜 집들이 눈에 아른거린다. 나무집을 너무 우아하게 장식해주었던 제라늄은 자생력이 강해서 신경 쓰지 않아도 잘 자라고, 살충성분이 있어서 창가에 놓아두면 집안에 벌레가 들어오지 못하고, 꽃이 화사해서 아무리 오래된 집이라도 아름다운 새집처럼 꾸며준다는 말을 기억하며 진료실 창가에 제라늄을 놓아둔 지도 오래되었다.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려면 영혼을 맑고 아름답게 가꾸어야 한다고 한다. 얼굴이란 ‘얼’의 ‘꼴’이어서 ‘얼’을 아름답게 가꾸게 되면 그 ‘꼴’인 얼굴은 저절로 아름다워진다고 한다. 맑고 아름다운 영혼의 호흡을 위해 금년 여름휴가는 어디로 떠나지?

  

양정승
광주 향기로운 사과나무치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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