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ay Essay
제1764번째
나와 우리가 만나는 25thHybridTimeSquare 기대 (상)
우리는 80년대 초 학창시절을 보낸 부산치대 3기들이다. 80년 서울의 봄, 광주 민주화운동을 거쳐, 보이지 않던 실체가 마각을 서서히 드러내던 80년, 그 해 7월 31일 본고사가 폐지되고 처음으로 학력고사라는 시험을 치르고 입학한 81학번들이다. 졸업정원제(Graduation Quota System)을 도입한 첫 해이기도 하다. 졸업정원제란 졸업 정원보다 20% 더 선발하여 졸업할 때에는 정원만 졸업시키는 제도다. 당시 우리들에게는 데모 방지용 제도로 여겨졌고, 나중에는 졸정(卒定)제로 시작해 졸도(拙倒)제를 거쳐 졸속(拙速)제로 바뀐 코믹한 제도다.
국가적으로는 6·25 전쟁 이후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베이붐 세대의 거의 끝자락에 있던 자들이다. 로맨틱하다고 들었던 freshmen 시절은 졸정제와 예과 2학년 2학기부터 시작된 기초 과목 중 일부를 본과 아미동 캠퍼스에서 수강해야 했기에 후딱 흘려가버렸다. 이후 일명 “아미고(부산 서구 아미동 소재 부산치대?)”라 불리는 닭장차(?) 같은 아미동 교실에서 본과 1학년에는 힘든 기초 과목 공부로, 2~3학년 임상 과목으로, 3학년 2학기부터는 임상 실습으로 이어지면서 주옥 같은 우리의 청춘을 묻어야(?) 했다. 내 치과 앞에 있는 일명 “마두고”라고 하는 사법연수원에 다니는 연수생들처럼.
어찌 보면 우리의 학창 시절은 너무나 단무지(단순하고 무지하게)로 보냈던 것 같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재시 치고 나면 한 학기가 가고, 잠시 방학을 지나면, 또 다시 중간고사, 기말고사, 재시를 거쳐 한 학년을 보냈으니 말이다. 그래도 서로에게 조금 숨통을 틔울 수 있었던 것은 임상 전단계 실습 시간에 다양한 물성을 보이는 왁스(wax)처럼 wax & wane하며 지내온 것이 아닐까 쉽다. 본과 3학년 2학기부터 시작된 임상실습 일명 PK 시절, 환자를 배정받아 전공의 선생님들과 교수님 밑에서 실습하면서 정말 엽기적인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알지네이트가 굳지 않아 입안에서 빼 보니 경화 석고(improved stone)로 인상을 뜨려고 했던 사건이다. 요즘 애들 말로 헐(?)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지나고 와서 보니 이러한 아련한 추억거리가 만담의 안주거리가 되니… 또 하나 잊지 못할 이벤트는 이것이다. 같은 문제가 계속 반복되고 숱한 오답으로 점철된 공포의 족보책(genealogy)사건이다. 그래도 부산치대 첫 족보책이다. 지금 생각하면 시시콜콜하지만 그때만 해도 족보책 문제로 우리들 사이가 자못 심각했었다. 깊은 이야기는 25주년 모임 당일 회포 풀면서 안주거리로 남겨 두기로 하자. 침묵이 금 아닌가? 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 족보책으로 공부하여 당당하게 국가고시라는 관문도 통과하였고, 보건사회부(보건복지부)장관이 허가한 D.D.S. 면허증도 받았다.
물론 선택 받은 자들은 전공의 과정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흔히 700(칠빵빵)이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동료들은 졸업할 겨를도 없이, 2월초에 군의학교에 입대하고 영천3사관학교에서 8주간의 장교 훈련을 거쳐 공중보건의로 가고, 일부 여성 동창들은 페이닥터로 흩어져서 우리들의 영원한 diaspora는 시작되었다. 이제 25년이 지난 지금 일부 동기들이 모교와 타 의대의 교수이자 봉직의로, 대다수는 지역사회에서 구강건강지킴이인 개업의로 살아가고 있다. 어(우?)찌 하다 보니 필자는 서울을 넘어 북한과 가까운 임진강 근처 일산에서 9년째 개업의로 일하게 되었다. 그래도 좀 더 거창하게 가격과 자기이익의 극대화를 도모하는 개업의가 아닌 가치와 공익을 생각하는 창업의의 정신으로 일하고 있다고 자위하면서.
지난 연말에는 광한리 횟집에서 25명이 만나서 졸업 24주년 동기 모임을 가졌다. 25주년 행사 준비를 위한 예비 성격의 모임이라고 해야겠지. 졸업 25주년을 기념하여 치전원 후배들과의 멘토링 만남과 우리들의 졸업여행이 준비되어 있는데 이것을 위한 준비 모임의 성격 말이다. 필자는 부산 갈매기에서 서울 까마귀가 된 지가 벌써 11년이 되었고, 심지어 고향에 있을 때에도 잘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이라 그런지 정말 반가웠다. 사십이 지나면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통속적인 이야기가 있는데, 그 날 본 친구들은 자기 얼굴에 무한 책임을 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한 마디로 very good(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이었다. 그래 서로 서로는 잘 모르는 갖가지 풍상을 겪어 빨래판 같은 주름진 얼굴일 줄 알았는데, 글쎄 다들 보톡스를 맞은 팽팽한 얼굴 모습으로 세월의 연륜을 한껏 머금은 문채(文彩) 가득한 반백(半白)의 머리카락으로 나타난 친구들. 그래도 이렇게 표현해야겠지. 반백의 항노화 얼굴(anti-aging face)을 넘어(beyond) 반백(半白)의 제대로 나이 든 얼굴(well-aging face)이라고 해야 하겠지. 학부 때의 우리는 각 개인의 특질이 도드라져 도무지 함께 어울리지 못하는 odd(4차원적?)한 개인들의 합집합 커뮤니티였던 것 같았는데, 이제는 희끗 희끗한 문채(文彩)에 곰삭은 개성으로 버물어진 비주얼(visual)이되고 unique한 교집합(비빕밥) 커뮤니티로 변천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면 필자의 지나친 비약일까?
그래도 그날 모임의 백미(白眉)는 단연 이미 졸업 20주년 모임에서 이번 25주년 추억 여행과 기념 행사를 위해 여성 동창(동무?)들이 섬세하게 준비해둔 종자돈(?)이 아니었을까 싶다. ‘원님 덕에 나팔 분다’고 이제 그 통장에 준비된 종자돈에 올라 타고 갈 일만 남은 것 같았다. 자녀들도 왠 만큼 사회의 일원으로 키운 그들이기에 그만큼 여유롭고 넉넉하게 보이지 않았을까?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밤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이성근
일산 예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