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ay Essay
제1769번째
나의 문학 등단기
나의 출생지는 시골 갯마을이다. 그렇다고 바다가 빤히 보이지는 않았다. 서해를 등진 동남향으로 새벽동이 터 오르면 들녘을 지나온 햇살이 마루 건너 큰방까지 쨍 들어오곤 했다. 그래서 동네 이름이 양지말이다.
마을 뒤로 대밭과 솔밭이 겹으로 감싸고 솔밭 끝으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마을 앞 오른쪽으로 큰 저수지가 거울같이 빛났다. 철길이 없는데도 어느 때는 희미하게 들리는 기적소리가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이렇게 바다와 솔밭이 있고 밤나무와 들이 호수를 에워싼 그 옛날의 내 고향이 눈에 선하다.
교통이 불편했던 옛날 고창 질마제에 사셨던 서정주 시인도 초등학생 시절, 신작로를 이용해 통학하기엔 흥덕으로 뺑 돌아야했다. 그래서 나룻배를 타거나 썰물 때는 바지를 무릎 위로 걷어 올리고, 개를 건너와 직선거리인 우리 동네 뒤, 대밭과 솔밭사이 오솔길 따라 줄포초등학교를 다녔다. 나의 작은 아버지와 초등학교 동창생이라 그 시절 댕기를 길게 따고, 우리 큰 집 사랑방에서 침식도 자주했다고 들었다. 나에게 미당 선생은 초등학교 대선배이시다.
내 어릴 때는 산이나 들 그리고 대밭에 새떼와 까마귀가 무리지어 자주 앉았다. 겨울이면 기러기가 하늘에 악보를 자주 그리고, 호수에는 청둥오리들이 까맣게 수를 놓았다. 지금 생각하면 내 고향은 내 시심을 싹틔운 큰 온실 같았다.
뇌염이 유행했던 시절, 내 여동생이 뇌염에 걸려 의사의 왕진이 잦았고, 할머니 댁의 개가 암내 나는 바람에 이웃마을 세퍼드가 찾아와 어슬렁거리며 맴돌다 뛰어가는 내 허벅지를 물어 한 달 이상 병원에 다니며 주사를 맞았다. 그때 나는 의사의 역할에 매료되기도 했다.
초등학교 시절, 짧은 글짓기는 늘 동그라미를 맞았지만 나는 공부에 두각을 나타내거나 문학책에 심취되지는 않았다. 한국전쟁 직후 어려운 시기에 내가 의과대학을 지망한다고 했을 때, 외사촌 형은 내게 국문과에 가서 교사가 되어 글을 쓰라고 했다. 내 외종형이 서울 문리대 재학생일 때, 내가 보낸 엽서 한 장에서 문학적인 소질을 짐작한 것 같다. 내 고집에 그 형은 치과의사가 응급환자가 없어 여가를 활용하기에는 좋은 직업이라고 알려주었다. 형의 조언대로 나는 치과의사가 되어 서울에서 개업했다. 개업 초기 내 진료실은 창살 없는 감옥이 된 기분이었다. 그 갈등을 독서로 달랠 수밖에 없었다.
마침 누하동 헌책방에서 병석에 있는 가난했던 어느 시인의 부인이 내다 판 시집을 다량으로 구입할 수가 있었다. 한해 겨울, 손에 잡히는 대로 백여 권을 읽으며 내 마음을 추스렸다. 시를 읽으면 시(詩)스럽던 내 고향이 떠올라 실감났다. 서툴게 시작한 나의 자작시도 어느새 노트 한권이 되었다.
문학지에서 장순하 시조시인이 자주 등장했다. 장 선생님은 고교시절 나의 스승이시다. 수소문 끝에 내 노트를 보여드렸더니 “김 박사는 시심이 있다” 그 말씀에 용기가 났다. 그 후에 나는 여행에서 얻은 시를 ‘월간문학’에 투고했다.
황금찬 선생님의 심사평 “김영훈 시를 끝까지 들고 있다 아깝게 놓았다”를 보고 당선 된 것 이상으로 기뻤다. 그 다음 도전에 성춘복 선생님이 심사할 때, 내 시 ‘자메이카의 빛’이 당선되어 등단하게 되었다.
치과의사로서 시인이 된 것이 내게는 금상첨화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진료시간 핑계로 심도 있는 맞춤형이 아니라 헐렁한 시인의 외투를 입은 것 같다.
일생을 치과의사로서 시인으로 걸어온 내 길을 뒤돌아보면, 대학생으로서 수학과 철학을 공부하던 외사촌 형이 내 운명의 길을 설계해준 것 같아 놀랍다.
작시 할 때는 늘 내 고향의 시(詩)같은 풍경이 떠오르고, 어떤 사연으로 나와 인연을 가졌던 문인들이 모두 내 문학의 소중한 자산이 되어 감사한 마음 그지없다.
*‘월간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꿈으로 날으는 새’ ‘가시덤불에 맺힌 이슬’ ‘바람타고 크는 나무’ ‘꽃이 별이 될 때’ ‘모두가 바람이다’ ‘通仁詩’가 있다.
김영훈
김영훈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