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ay Essay
제1774번째
네팔의 추억(하)
<2067호에 이어 계속>
일년반동안 네팔에서 생활하면서 총 5번 메디컬캠프를 다녀왔습니다. 코이카 의료단원들과 2번, 람중병원 식구들과 3번. 한국에서는 절대 경험하지 못할 산이 많은 이곳 네팔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트레킹같은 의료캠프. 병원이 있는 곳까지 나오려면 이삼일은 걸어서 나와야만하는 동네로 의료진들이 찾아가기 때문에 찾아가는 길도 험했지만 캠프를 진행하는 동안 너무나 많은 동네 주민들로 인해 약간은 힘들었던 캠프였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캠프는 ‘무구’라는 지역으로 코이카 의료단원들과 갔던 캠프인데, 무구라는 지역은 네팔 75개 District 중 가장 못사는 동네로 인간계발조사 75위, 유아사망률 1위, 사망평균연령 48세 최하위, 전기가 안 들어오는 곳입니다. 그 곳에서의 메디컬캠프는 절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가기위해 수도 카트만두에서 차로 12시간 걸려 네팔건즈라는 도시로 간 후, 그곳에서 8인승 경비행기를 타고 딸자지역까지 가서 다시 걸어서 7시간을 가야 우리가 갈 최종목적지 로와지역이 나왔습니다. 가는데만 2일이 걸리고 가서 의료진들 회의도 전기가 안 들어와 랜턴을 켜고 해야만 했고, 이렇게 어렵게 의료진들이 간 것이기에 총 2일 진료하는데 의사선생님 4명이 2일동안 1400명을 봤습니다. 우리는 가기전에 1000명을 예상하고 갔기 때문에 마지막날 오후가 되니 약도 떨어져가고 해 드릴게 없어지는데, 환자들은 다른 동네에서도 어떻게 소문을 듣고 왔는지 2~3일씩 걸어서 와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 되니 상황은 점점 험악해졌습니다. 혹시 기다리다 진료를 못받을까봐 마을사람들이 점점 난폭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간신히 지역주민들과 경찰들까지 와서 1400명에서 진료표를 끊어 별 탈 없이 잘 마무리를 했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만큼 의료진들이 약 하나가 절실했던 것입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하나하나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던 것 같습니다.
작년 가을에는 산을 좋아하시는 부모님이 네팔에 오셔서 네팔에 최대명절인 ‘더사인(한국의 추석 비슷한 명절)’ 기간에 부모님과 같이 안나푸르나 트레킹도 다녀왔습니다. 올해 초에는 포카라에 엄홍길 대장님이 코이카단원들에게 밥을 사주신다고해 근처 단원들과 엄대장님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올해 봄엔 ‘랑탕’이라는 산에 일주일간 트레킹도 다녀왔습니다.
일할 때는 정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꾀부리지 않고 될 수 있으면 많은 학교를 다니려고 했고, 응급실에서 일반 메디컬분야도 배웠고, 메디컬 캠프에도 열심히 참여했고, 그리고 네팔 히말라야에서 부모님과 같이 트레킹도 하고 정말 알차게 잘 지냈던 것 같습니다.
비록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2년의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1년 6개월만에 들어왔지만, 처음 2010년 가을에 코이카에 붙고난 후 갈지말지 고민했던 것이 무색할만큼 정말 후회 없이 지내다 온 것 같습니다.
지금 와서 약간 아쉬운 것은 ‘이러한 것을 20대 때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 20대에는 왜 이러한 기회를 못 잡았을까’ 하는 후회입니다. 1997년 치위생과에 들어가서 2000년에 졸업하고 계속 치과에서만 일했습니다. 치과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여러 가지 기회가 있다고는 그 당시에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감히 치과위생사 후배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정말 젊었을 때 여러 가지 경험을 많이 쌓아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치위생과를 졸업하고 치과에 취직하는 것만이 길이 아닌 이러한 해외봉사를 나갈 수도 있고, 좀 더 공부를 해서 해외에서 치위생 일을 할 수도 있고, 아주 작은 저희의 기술을 그들에게 알려줄 수도 있고, 정말 많은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전 한국에 들어온 지 약 한 달이 넘었습니다. 이제 슬슬 새로 직장을 구해야겠죠. 나이도 많고 2년이란 공백이 있는 저한테 요즘같이 새롭게 빨리 빨리 변하는 치과계에서 일자리 구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을 알지만, 저한테 다시 2010년으로 돌아가 해외봉사를 나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전 아마 당연히 다시 나간다고 할 것입니다. 네팔에서의 1년 6개월은 저한테 평생 잊지 못할 선물이었니까요.
김주미
치과위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