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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92번째) 가을, 연민 그리고 영화…

Relay Essay
제1792번째


가을, 연민 그리고 영화…


가을은 나에게 영화의 계절이다. 그리고 가을은 닥쳐올 추위를 걱정하고 그 추위에 떨고 있을 사람들을 걱정하는 연민의 계절이다. 이렇게 차가운 비가 오는 날은 그 연민이 더한다. 결혼 전 필자는 주말이면 이틀 밤을 꼬박 밤새워 영화를 즐겼었다. 결혼 8년차, 가족을 이룬 지금은 그나마 가끔 아내와 함께 늦은 밤 나란히 누워 영화를 즐기는 낙이 전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때와는 다르게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이 영화를 보는 재미를 더해준다. 재미있는 영화가 좋은 영화다 라는 지론을 가진 필자는 재미 있을 것 같은 영화는 가리지 않고 즐긴다. 전쟁, 액션, SF, 공포, 멜로, 컬트 등등… 모든 장르의 영화들이 다 제각각의 색깔이 있고 재미가 담겨있다. 내가 보았던 수 많은 영화들 중 이 연민의 계절에 어울리기도 하고 나에게 연민의 감정을 가르쳐 준 31년 전에 보았던 영화 한편을 이야기 하고 싶다. 고백하자면 영화의 모든 내용이 완벽하게 기억나지 않아서 인터넷의 도움을 성실히 받았다.


이탈리아의 영화거장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가 감독한 ‘길’(La Strada)은 그의 아내인 쥴리에타 마시나(Giulietta Masina)를 극 중 백치이지만 순수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여주인공 젤소미나(Gelsomina)로 출연시킨다. 한편 남자주인공은 너무나도 유명한 안소니 퀸(Anthony Quinn)이 떠돌이 차력사 이자 난폭한 성격의 잠파노(Zampana)역할로 출연한다. 이 영화가 1954년도 작품인 만큼 젊은 시절의 안소니퀸을 만날 수 있다. 당시의 영화기술이 동시녹음이 불가능했던 이유로 영화를 보는 내내 장면과 소리 사이의 불일치가 느껴지는 것도 이 영화는 보는 재미 중 하나이다.


가난에 허덕이는 가정의 큰 딸 젤소미나는 그녀의 부모에 의해 1만리라에 떠돌이 차력사 잠파노에게 팔려간다. 잠파노는 그녀를 강제로 아내로 삼게 되고 그가 사람들 앞에서 차력을 하는 동안 그녀는 북을 치며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돈을 받는 등의 잔일을 도맡아 하게 된다. 포악한 성격의 잠파노는 동물을 조련하듯 학대와 수모를 주면서 그녀를 훈련시킨다. 절망에 잠긴 그녀의 대사 한마디 “나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지겨워요. 내가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어요.” 젤소미나가 삶의 희망을 잃어가는 그때 그녀 앞에 나무도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광대가 등장한다. 나무도장을 통해 세상에 가치 없는 삶이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그녀는 잠파노와 함께 하는 시간과 여정에 아름다운 의미를 부여하며 잠파노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키워간다. 그러나 잠파노는 젤소미나와 가까이 지내는 나무도장을 강하게 질투하고 급기야 나무도장을 살해하기에 이른다. 충격에 휩싸인 젤소미나는 슬픔과 고통에 병에 걸리고 잠파노는 도망자로서의 두려움과 병든 아내에 대한 큰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를 버리고 홀로 잠적해 버린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잠파노는 무심히 지나던 길 위에서 젤소미나가 즐겨 연주하던 트럼펫 곡조를 흥얼거리는 여인을 발견하고 젤소미나의 행방에 대해 묻지만 그녀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나고 없다. 잠파노는 다시 걷는다. 눈물은 하염없이 흐르고 어느 해변가에 다달아 젤소미나에 대한 반성과 미안함이 뒤섞인 회한의 눈물을 쏟아낸다.


영화 ‘길’은 초반부터 마지막까지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하다. 딸을 팔고 떠나 보내며 흘리는 노모의 눈물, 잠파노에게 학대당하면서도 애정으로 잠파노를 걱정하는 가엾은 젤소미나 그리고 젤소미나에 대한 무한한 미안함을 토하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잠파노, 아마도 신으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수 많은 감정 중에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감정이 있다면 바로 연민 아닐까? 영화를 보던 중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린 대목이 바로 잠파노가 회한의 눈물을 쏟아내던 그 장면이다. 왜 그런지 아직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린 나이였던 필자에게는 혼자 남게 되고 영원히 젤소미나를 볼 수 없는 잠파노가 너무나 가엾게 느껴졌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볼 수 없고 미안하다는 말 조차도 할 수 없다는 그 상황 자체도 나의 가슴을 시리게 만드는 설정이었다. 이 영화는 길 위에 두 남녀 주인공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투사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겪게 되는 사랑, 고난, 질투 그리고 연민의 감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길’은 우리 인생을 파노라마처럼 담고 있는 길게 늘어진 영화필름과 같다. 그 끝을 상상할 수는 있지만 끝까지 가보지 않고는 볼 수는 없는 길고도 먼 길, 그것이 우리들의 인생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잔잔하고 아름답지만 애잔함이 느껴지는 트럼펫 연주곡을 자주 듣게 된다. ‘젤소미나의 테마’로 알려진 이 곡은 이탈리아의 유명한 영화음악 작곡자인 리노 로타(Nino Rota)가 작곡하였고 영화 개봉 이후 세계적으로 유명한 곡이 되었다. 이후로도 리노 로타는 페데리코 펠리니감독과 함께하며 많은 영화의 곡을 작곡하여 이탈리아 영화음악의 거장으로 이름을 날린다.


창밖에 내리던 비는 멈추었다. 도로 위 뜸한 차량들이 시간이 많이 늦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길 위를 뒹구는 낙엽이 춥게만 보인다. 이제 나도 먼 길을 달려 연민 가득한 마음으로 가족들을 마음 깊이 안아주고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서 청소와 설거지를 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마관욱 
가이스트리히코리아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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