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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33번째) 서른 즈음을 보내며

Relay Essay
제1833번째


서른 즈음을 보내며

  

여자들은 서른 즈음이 되면 혹독한 몸살을 앓는다고 한다. 거의 모두가 그렇다고 해도 좋을 만큼 십중팔구 그렇다.


이제 내 나이도 ‘서른’이 되었다. ‘내가 꿈꾸던 서른의 모습이 이런 거 였나’ 이따금씩 자문도 해보지만 만족스럽지 않다. 서른이 되고, 곧 결혼과 함께 ‘독립’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요즈음 유난히 ‘가족’에 대한 생각이 잦아진다.


아버지는 가정에 대한 애착이 강하시다. 또한 외향적인 성격으로 어디서든 부지런히 움직이시는 아버지를 따라 우리 가족들은 전국 방방곡곡 안다녀본 곳이 손에 꼽을 정도다.


특히 매해 1월 1일, 내 짧은 기억 단편 속에서 1월 1일은 참으로 가정적인 날이다.


20년 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우리 가족은 경포대가 보이는 한 호텔에서 일출을 바라보며 새해를 맞았다. 아버지가 얼마나 여행을 좋아는 지, 가족결속력을 얼마나 중요시 하는 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가족 중 한명이라도 여행과 같은 ‘가족 모임’에 빠지면 매우 섭섭해 하시는 부모님 덕에 자식들은 서른이 다된 나이에도, 사춘기가 막 끝나 여드름이 아직 아물지 않은 더벅머리 남동생까지, 지금까지 휴가를 맞춰서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다니고, 그런 걸 당연하게 여겼다.


몇 년 전이었을까. 한 가족 여행에서는 한 노부부가 다 큰 애들까지 모두 데리고 여행을 다닌다고 대단하다며 부러워하셨다. 그때 내 눈에 비친 부모님의 얼굴에는 뿌듯한 미소가 어려 있었고, 그 걸 보는 내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가족이 향하는 여행 장소는 계절마다 다르다. 그렇다고 특이하지는 않다. 여름에는 주로 수영장이나 바다를 우선순위에 두고 겨울에는 스키장으로 향한다. 어쩌다보니 결국 강원도가 매번 여행 장소로 꼽힌다. 강원도 어느 한적한 호텔에 숙소만 정해두고, 우리 가족은 내비게이션도 달지 않은 자동차를 타고 그냥 마음 흘러가는 데로, 길이 난 곳으로 여기저기 다니곤 했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가족 중 누군가가 자동차 창문 너머 무엇인가를 보고 경탄의 소리를 터트리면 그 곳이 곧 우리 가족이 향하는 목적지이다.


예정치 않게 도착한 정선 한 작은 마을에 들렀을 때는 햇볕에 그을린 10살배기 아이들이 인라인스케이트를 한 쪽씩을 나눠 끼고 나머지 발은 운동화를 신은 채로 길거리를 누비는 모습을 가족 모두 말없이 지켜본다. 왠지 모르게 마음 한 켠이 짠해진다. 서울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풍경이어서 그랬을까.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세상물정 모르는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시절에 우리 부모님은 주말마다 자식들을 데리고 서울 이곳저곳을 함께 구경시켜 주셨다.


서울 여러 대학 캠퍼스를 보여주시며, 우리가 스스로 공부하기를 바라셨고, 경복궁과 창경궁, 덕수궁 등을 다니시며,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갖기를 바라셨다. 또한 달동네와 비닐하우스촌 등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을 돕고 감사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셨다.


나는 내 자신이 단기 기억력이 나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어제 내가 뭘 했는지 지금도 가물가물하기만 하다. 하지만 부모님의 손을 꼭 잡고 다녔던 그 때의 기억만은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청계천이 복원되기 전 고가다리위에서 바라본 노을 아래 금새라도 무너질 듯한 낡은 건물들 이나, 지금은 모교가 된 연세대 캠퍼스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하던 모습, 어디서 뜯어온 것처럼 보이는 나무 문짝을 대충 얹어 놓아 비만 내리면 대야나 양동이, 심지어 밥공기로 빗물을 받거나 집안이 살짝 보이기까지 했던 달동네 모습들이 기억의 잔상으로 남는다.


항상 함께 바라보고 얘기 나누던 가족들은 그 기억의 잔상에 빠지는 법이 없다.


내 나이 이제 ‘서른’. 기대와 현실 사이의 낮은 싱크로율을 확인하고 그로 인해 끊임없이 흔들리고 또 중심을 잡아가는 시기이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내 기억 속에, 마음속에는 나를 잡아주는 가족이 있다. 


앞으로도 나와 가족, 그리고 소중한 인연으로 이뤄지는 단짝과 함께 자주 여행을 다니길 기대하고 있다. 언젠가 모두 함께 같은 곳에 있던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정을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올해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온 가족이 모여 해외여행을 준비 중에 있다. 아이슬란드로 교정학회 세미나를 가게 되었다는 동생의 말에 온 가족이 그 여행에 따라나서기로 한 것이다. 아빠와 두 딸, 큰 딸과 막내, 둘째와 막내가 함께한 해외여행은 했었지만, 이처럼 다섯 식구가 한꺼번에 해외로 나가게 된 것은 처음이다. 


올가을 결혼을 앞둔 ‘나’와 결혼 30주년을 맞은 부모님 모두에게 의미가 있는 여행이 될 것만 같다. 여자가 서른 즈음이 되면 앓는 혹독한 몸살을, 나는 ‘가족’을 통해 힐링하고 있었다.

  

권혜리
약수연세치과의원 치과위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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