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떠나지 않고 떠나는 법 익히기
원 영 스님
대한불교조계종 교수아사리
급한 일로 택시를 탔다. 기사님이 백미러를 통해 힐끔힐끔 나를 보았다. 출가자인 나에게는 흔히 있는 일, 기사님에게는 내 모습이 다소 생소했으리라. 망설임이 담긴 눈빛으로 몇 차례를 넘겨보더니 기사님은 말문을 열었다. “저 스님, 뭣 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꽤나 조심스런 말투에 살짝 신경이 쓰였다.
“제가 보기에는 스님이 아직 어려 보이는데 왜 출가하셨답니까?” 하는 것이다. 절집에선 보통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이 예의인데,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솔직히 난감하다. 하지만 무슨 말이든 해줘야 할 것 같아 아귀가 딱 맞는 답은 아니지만 일단 말을 꺼냈다.
“기사님 마음이나 제 마음이나 다를 바가 없어요. 살다보면 어느 날, 훌쩍 멀리 떠나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그 마음이 깊어지고 깊어져서 가눌 길 없이 무거워지면 저처럼 출가자의 길을 택하기도 하지요.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각자 나름대로의 출가동기가 다 있으니까요.” “예, 정말 사는 게 지겨워서 짜증날 때가 많아요. 말씀을 듣고 보니 스님이 무지 부럽네요. 이제는 떠나려 해도 처자식 때문에 못 떠납니다” 라고 한다. “그래도 방법은 있지 않을까요?” 하고 물으니, 기사님은 놀라며 “예? 방법이요? 그게 뭔가요?” 하고 묻는다. “뭐긴요. 떠나지 않고 떠나는 법을 익혀야지요.” 기사님은 거창한 해법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내 대답에 약간 실망한 듯 “떠나지 않고 떠나는 법이요~. 뭔지 알듯 말듯 하네요”라며 웃는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건 그 상황에 맞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 집에 오면 집안에 맡는 역할을 해야 하고, 밖에 나가면 또 그에 맡는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그런데 상황이 늘 좋게만 흘러가는 것만은 아니므로, 우리는 그 안에서 발생하는 온갖 트러블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괴로워한다. 가정이든 일이든 항상 뭔가에 옭아 매인 듯 구속돼 살면서 우리는 어딘가 벗어날 구멍이 없나 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만, 정작 그런 길을 찾는다 하더라도 발걸음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나만 괴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끝까지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런 삶 속에서 떠나지 않고 떠나는 법을 익히기란 쉽지 않을 터, 그나마 방법이 있다면 자신이 처한 현실은 바꿀 수 없어도 현실을 바라보는 눈과 그 현실을 대하는 태도를 바꿈으로써 삶에 변화를 주는 방법이 있겠다. 새장에 갇힌 새처럼 현실이 답답하고 암울하게 느껴진다고 해서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다가는 지쳐서 목만 늘어질 게 뻔하다. 그러니 자신이 서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의 태도를 바꾸어 상황을 극복해보라는 얘기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에는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라고 쓰여 있다고 한다. 이는 자유롭기에 바라는 것이 없다는 뜻일 수도 있고, 반대로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자유롭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덧없는 인생이다. 무엇에 집착하며, 또한 무엇을 바라고 살겠는가.
일상의 작은 일에서부터 하나씩 자신을 바꾸어보자. ‘자유’라는 단어를 꼭 ‘떠남’이라는 단어와 결부시켜서 어디론가 떠나야만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자유는 이 순간 나를 변화시킴으로써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