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가을날 친구 어머니의 죽음
배철민
메트로치과의원 원장
작년 가을 갑자기 친구의 모친상을 알리는 문자를 받았다. 6년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친구 어머니께서는 암으로 투병하고 계셨다. 친구는 어머니의 간병과 회사일로 많이 힘들어했었다. 그날 저녁 서둘러 장례식장으로 갔다. 운구는 친한 고등학교때 친구들이 하기로 했다.
장례절차는 가톨릭식으로 진행되었는데 분당 장지로 가기전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보게되었다. 장례미사가 시작되고 신부님들이 운구와 함께 제단으로 들어오셨다. 모든 신자들이 일어나서 십자가를 들고오는 사제들 운구를 바라보면서 두손으로 합장하고 기도하고 있었다. 처음 들어본 가톨릭성가 520번 ‘오늘 이세상떠난’은 장엄하면서도 심금을 울리는 그런 곡이었다. 뭔가 가슴속 깊이 울컥 올라오는 깊은 감정의 떨림을 느꼈다. 그때 중앙통로 건너에 한 기도하는 여인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하얀 미사보를 쓰고 늘씬한 키에 아름다운 여인.
장례미사의 마지막 성찬식이 끝나고 그 장엄하고 아름다운 진혼곡과 함께 다시 운구행렬이 예배실 밖으로 나왔다. 장례미사에는 일반신자들도 참석한다는 걸로봐서 그녀는 친구의 어머니와 아무 관계없는 그냥 성당의 일반 신자인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알지도 못하는 망자에게 그녀는 운구의 움직임에 따라 몸의 방향을 바꿔가며 운구를 향해 운구행렬이 예배실 문밖을 나갈때까지 고개숙인채 기도하고 있었다. 한명의 순례자처럼 남을 위한 기도, 타인에 대한 사랑,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과, 신에 대한 사랑을 간직한 비밀스러움의 아름다움. 그 모든 것이 그녀의 합장한 두손과 태도에서 빛나고 있었다.
가톨릭의 미사는 2000년의 역사를 가진 Roman Catholic 원시기독교의 향내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Rome제국에서부터 이어지는 그 역사와 전통의 무게를 Catholic은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더 초기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산되는 느낌이었다. 아울러 이 세상을 마지막 떠나는 자에 대한 아름다운 예우가 장엄한 미사의식과 더불어 나를 깊은 감동의 물결에 잠기게 했다.
그날 밤 아파트 창문을 열고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들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옛날 어릴 때 교회에서 예배 시작하기전 기도할 때 아름다운 성가대의 찬송가를 들으면서 느꼈던 신성해지고 깨끗해지는 느낌들, 경건함, 숭고함. 실로 오랜만에 종교의 거룩함, 그리스도의 사랑, 타인에 대한 사랑과 봉사 그런 기분에 젖을 수 있었다. 요즘의 나는 얼마나 이기적이며 물질적 가치관에 젖어있었던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의 정신도 점점 물질의 노예가 되어가는 것 같다.
정말 우리는 서로가 경쟁하고 비교하고 나만의 것을 추구할 때 행복이라는 파랑새는 저멀리 달아나고 나의 실존은 모든 타인과 분리되고 고독해지는 것 같다. 병원에서 우리 치과의사들은 또 얼마나 고립되고 타인과 단절되기 쉬운 존재들인가? 환자도 직원들도 내가 추구하는 물질적 목표에만 탐닉한다면 그 모두를 내 스스로가 소외시키고 역설적으로 나 또한 그 모든 타인과 환경으로부터 소외될 것이다. 그것은 결국 내 존재 가치의 죽음으로 귀결될것이다. 그런가운데 어떻게 내 마음에 사랑과 기쁨, 평화와 안식이 깃들수있겠는가? 붓다나 그리스도처럼 이웃에 대한 사랑, 베품, 헌신 이런것만이 우리의 병든 영혼을 구원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가끔씩 가톨릭 신부님처럼 살고싶단 생각이 들때도있다.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사하며 그렇게 살면 정말 가진 것이 없더라도 행복해지지 않을까?
그날 장례미사의 그 신실하고 성스럽고 고귀하게 느껴졌던 여인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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