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ay Essay
제1871번째
추석 단상(秋夕 斷想)
긴 추석 연휴가 끝나가는 시점이다. 가족, 친지들과 연휴를 보내고 모두가 두 손 가득히 짐을 들고 기차역 플랫폼에 서있다. 예정 출발 시간이 되었지만 아직 열차가 들어오지 않고 있다. 돌아가는 길인지 기다리는 조바심보다는 여유로운 표정들의 사람들이다. 어두운 밤, 열차에 몸을 실은 뒤 하나둘 조용히 침잠해 간다. 떠나기 전 마지막 식사를 많이 하였는지 쉬이 눈이 감기지 않는다. 자연스레 노트북 전원버튼으로 손을 옮긴다.
돌아오는 열차 위에서 명절 연휴를 곰곰이 반추해본다. 명절의 가장 좋은 점이란 오랫동안 보지 못한 가족 그리고 친지들을 만나는 일이 아닐까 싶다. 혈육의 끈끈한 정과 옛 추억들을 함께 나눈 이들이 모여 맛있는 음식과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큼 좋은 일도 없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 조각을 함께 맞춰나간다. 하나씩 맞춰가는 과거의 조각들은 현재의 조각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열차 밖 풍경을 살피면 그 속에 나도 비치듯, 과거와 현재를 살피며 내 모습을 오롯이 발견한다. 아무 허물없는 그들과의 조각 맞추기 시간은 본연의 내 모습을 찾을 수 있게 한다.
이번 명절에는 나이 먹어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명절이라는 주제어 아래 저장된 사진들이 내 머릿속을 차례차례 지나간다. 맛있는 음식들과 텔레비전에서 해주던 만화들, 그리고 친척들과 깔깔거리며 뛰어 놀았던 어린 시절.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사춘기. 그리고 어른들의 이야기도 듣고 나보다 어린 조카들을 돌보는 이번 추석. 그래 그렇다. 어릴 때 명절 상에 뭐가 어떻게 올라가는지 준비가 되는지는 내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명절 상 위 잘 깎여진 알밤을 언제야 먹을 수 있을까 궁리만 했던 나였다. 이제는 차례 상에 뭐가 올라가는지 더 관심을 쏟고, 차례 상에 술을 올리는 내 모습이 새로이 자리하고 있다. 반면 과거 명절날은 오래된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점점 흐릿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친척 어른들도 예년과는 다른 말들을 내게 해주셨다. 8남매의 막내로 자란 고모께서 말씀하셨다. 빡빡하게 살지 말라고 조금은 느슨하게 둥글둥글 살라고 말이다. 돌이켜 보면 어렸을 때부터 강박증처럼 모든 일을 완벽히 하려고 한 나였다. 또 내 기준에 맞지 않는 일에 스트레스 받고 끙끙거리던 나였다. 어릴 적 시간을 많이 보낸 고모도 나를 보고 이제는 나이를 좀 먹었다고 생각하시지 않았을까. 누구나 그렇듯 나이가 들어갈수록 내 뜻대로 되는 일보다 아닌 일이 많아지는 것을 하루하루 느끼게 된다. 심지어 정시 출발 정시 도착한다는 열차도 오늘처럼 늦듯이 말이다. 언제 어디서 비껴갈지 모르는 일들 가득한 세상사, 고모의 말씀을 되새겨 보는 귀경길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오다 낯선 가야금 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고개를 들어보니 파란배경에 또박또박 쓰인 서울역 간판이 보인다. 명절 연휴를 뒤로하고 이제 일상으로 돌아간다. 열차가 선로를 따라 빨리 달리기도 천천히 달리기도 하며 목적지에 도착한다. 내 인생도 이렇게 뜻대로 안 될 때는 조금은 느리게 아니 가끔은 쉬었다 가듯 자연스레 나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다음 명절에는 어떤 내 모습이 기다릴까 기대해보며 글을 마친다.
신현철
서울대 치의학대학원 2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