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쓰이지 않는 말이지만 한센병은 문둥병이라고 불리며 천형으로 여겨졌다. 한센병은 약물치료로 완치가 가능한 질병이지만 얼굴이 일그러지고 손가락이 구부러지는 외양 탓에 한센인들은 차가운 사회적 시선과 차별속에서 외부와 고립된 정착촌을 형성하여 힘겨운 삶의 끈을 이어왔다. 구라봉사회는 1969년 7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뜻을 같이하는 몇 사람의 치과의사와 치대생들이 이러한 한센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 있는 국립나병원에서 치과진료 봉사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구라봉사회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매년 전국 각지의 한센인 정착촌을 찾아 다니며, 의치와 구강질환 치료를 통해 의료서비스의 사각지대에 놓인 한센인이 음식을 씹고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렇게 구라봉사회의 손길이 닿은 한센인이 2만6000여명, 만들어진 의치가 4000여개에 이르고 있다.
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에서 맞는 나의 여름방학 첫날은 구라봉사회 하기진료 준비로 시작되었다. 구라봉사회의 활동은 치과의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면서, 그 재능을 우리 사회에서 가장 열악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베푼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나는 입학과 동시에 구라봉사회의 일원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학기말시험을 마치자마자 하기진료 준비에 합류하게 되었다. 하기진료에 필요한 물품들을 정리하면서 난생 처음 보는 수 많은 기구들과 약품, 각종 치과 재료의 용도와 위치 등을 익혔고, 하기진료에 필요한 지식은 세미나를 통해 전수되었다. 선배님들의 조언을 듣고 빠뜨린 것이 없는지 확인하고 부족한 부분은 채우기를 거듭하면서 치의학대학원에서의 첫 여름방학을 시작하였다.
마침내 2주 가량의 준비기간을 마치며 하기진료를 눈앞에 두고 떨리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지난 하기진료에서 진료지로 정했던 곳은 전북 익산의 한센인 정착촌이었다. 익산으로 떠나기 며칠 전 준비평가회를 통하여 선배님들로부터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는 것을 확인받고, 그날 밤에는 많은 격려를 받았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당시에는 그 격려(?)가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정신없이 지나간 첫 학기를 뒤로하고 일주일 내내 하계진료를 준비하였지만 나는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은 1학년 학생일 뿐이었다. 의치 제작과정, 실제 진료지에서 의치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물론, 수 많은 기구와 물품들의 이름과 위치조차 완벽하게 외우지 못한 채로 전북 익산으로 떠나게 되었다. 익산에 가지고 내려갈 5톤(!) 가량의 짐을 거대한 트럭에 모두 실었을때, 이제 정말 떠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 세 시간 반쯤 달렸을까. 도착한 곳은 우리가 일주일 동안 머물 전북 익산에 위치한 금오양로원이라는 곳이었다. 우리는 이미 1차 인상을 위해 학기중 두 차례에 걸쳐 방문한 바 있었기 때문에 낯설지는 않았지만, 이전 방문과 다르게 하기진료때는 실내 진료실은 물론 야외작업장과 실내기공실을 설치해야 했다. 필요한 물품의 종류와 양도 그렇거니와, 치과의사 선생님과 도와주시는 기공사분들의 인력도 1차 인상 때보다 훨씬 많았다. 나의 하기진료 첫 날은 그렇게 월요일부터 시작할 진료를 준비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이번 하기진료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접수보조였다. 접수보조라고 하여 처음에는 쉽게 생각했었지만 막상 일을 닥쳐보니 그렇지가 않았다. 접수는 환자 안내는 물론이며, 기공실과 연락을 유지하여 기공물이 제작되는 시기에 맞춰 내원 약속을 잡는 일, 그리고 진료실에서 나오는 인상체와 기공물을 실외기공실과 실내 기공실에 나누어 보내는 일, 기공실에서 나온 기공물들을 환자들의 내원 약속 시간에 맞추어 준비하는 일, 그리고 모든 기공물의 제작단계와 위치를 추적하며 환자마다 어디까지 진료가 이루어졌는지 그 현황을 유지하는 일 등을 포함하였다. 실내 진료실, 야외 작업장, 실내 기공실에서 수 명의 환자 진료와 수십 개의 기공물 기공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으므로, 기공물들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를 파악하고 환자들의 다음 내원 시간에 맞추어 기공물을 준비할 수 있도록 야외 작업장, 실내 기공실과 조율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던 것이다. 나는 하계진료 준비기간 동안 있었던 세미나에서, 기공물이 각 작업 단계에 따라 어느 장소에서 기공이 이루어지는지 미리 설명을 들었지만 막상 접수대에 서니 기공물의 이동 경로가 머릿속에서 그려지지 않았다. 그제서야 나는 ‘1학년이니 선배들이 시키는대로 하면 되겠지’하고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또한, 일주일 동안 이른아침부터 늦은 시간까지 계속되는 활동에 피로감이 쌓여서 마지막에는 많이 지치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반전은 의치 제작 마지막 단계인 의치전달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의치전달이 이루어지던 날, 나는 접수 보조를 맡았던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접수대에 있었던 만큼 많은 한센병 환자들을 며칠 동안이나 지켜볼 수 있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환자들의 이름을 기억할 정도로 친숙해져 있었고, 또 나도 모르는 사이 그만큼 정도 들었던 것이다. 의치를 통에 담아서 드렸더니,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다고 불평하던 환자분들도 표정이 환해지면서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임무를 다하고 떠나기 전날, 환자분들에게 마지막으로 안내를 해 드릴 때 그 감회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계진료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일주일의 하기진료 기간, 두 차례에 걸친 서베이와 준비기간까지 합치면 몇 주 동안 들인 각고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또, 일주일의 하기진료 기간 내내 졸업하신 선생님들이 보여주신 열정은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며칠 되지 않는 여름 휴가를 쪼개서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을 마다하고 익산까지 찾아와서 진료하신 것분들도 계셨고, 아예 여름 휴가를 통째로 반납하신 선생님도 계셨다. 피서를 즐길 시간에 뙤약볕 아래에서 환자를 보고 의치를 만들고 다듬는 모습은 바로 내가 치의학대학원에 입학하기전 그려왔던 치과의사의 모습이었다.
나에게는 구라봉사회의 일원으로서 많지 않은 학생들이 하계진료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만만치 않은 일을 성공적으로 해낸다는 것 자체가 큰 자부심으로 다가왔다. 하계진료 기간 중에는 텅빈 공간을 실내진료실과 야외작업장과 실내기공실로 바꾸어 틀니 제작이 이루어졌고, 하기진료가 끝난 뒤에는 두 차례에 걸친 리콜첵으로 모든 과정이 마무리 되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방대한 이 모든 일들이 주체적으로 우리의 손 끝에서 시작되고 끝 마쳐졌다는 것. 이것이 바로 뜨거웠던 여름, 구라봉사회 하기진료에 참가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보람과 뿌듯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윤섭 서울대 치의학대학원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