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해외 독립운동 사적지 탐사를 위해 대마도를 비롯한 하얼빈 등을 여행했다. 특별히 중국에서는 안중근의사의 행적을 더듬으며 사서하는 부자 양반집 아들의 고행을 따라하게됐다. 하얼빈역은 1909년 10월 26일 조선의 원흉이자 동양평화를 파괴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코레야 우라(대한국 만세)”를 외친 곳이다. 내가 아는 것은 교과서적 내용 이것 뿐이었다.거사현장을 보려면 장춘에서 기차를 타야 하얼빈의 제일 플랫트폼에 도착할 수 있다.현장에는 바닥에 저격 장소 표시로 삼각형이, 피격자의 위치에는 4각형의 표시만이 남아있다고 한다. 방문 예정지는 대련시 형무국, 관동주법원, 여순감옥, 공동묘지, 731부대 방문 등이었지만 많은 일정 가운데 이곳 방문은 이번 여행의 핵심이었다.현지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어두움이었다. 그러나 가슴은 설레이기 시작했다. 4시간의 기차여행에서 내려 긴 지하도를 지나 현장에 접근하려는 순간 중국 공안원의 강력한 제지로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로 시도를 했으나 중국 외사과의 허가 없이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이유는 최근 일본의 거센 항의로 한국인의 출입을 각별히 단속한다는 것이다. 결국 역 구내이지만 또 하나
무엇보다도 대마도라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것은 한 가련한 여인 덕혜옹주이다. 덕혜옹주라는 한 여인을 통해 조선이라는 한 나라가 망하는 과정이 비유되기 때문이다. 1912년 폐위당한 환갑의 고종황제에게서 네 번째로 딸아이가 태어났다. 대한제국을 잃은 황제가 황궁이란 이름의 감옥에 갇혀 손녀 같은 딸의 재롱을 보며 일본에 대한 저항심과 괴로움을 달래면서 데라우찌 총독의 무례함을 견디어 낼 수 있었다. 황제는 헤이그 만국평화회담에 이준열사를 보내고, 연해주 독립군에 자금을 지원하고, 의병을 독려하고, 의친왕을 상해로 보내 독립운동에 가담시키려 했고, 또 한 가지 일본의 황가 혼혈정책을 막으려 궁내 시종의 조카와 비밀리에 옹주를 약혼시켰었다. 마약을 탄 커피를 토해버릴 정도로 명석했던 황제도 결국 옹주 7살 때 독살당해 덕혜옹주는 보호자를 잃고 말았다.12살 때 동경여자학습원으로 강제 유학하게 된 이후 18세 때 23세의 대마도주 소 타케유키 백작과의 정략결혼으로 내선일체의 상징물로 선전되기에 이른다. 혼인 6개월 후 인사차 시댁인 대마도를 방문했다. 이때 강제 징용되어 현지에서 노역을 당하던 2000명의 한인들이 한푼씩 모아 망국의 옹주를 맞이하기 위하여 “덕혜옹주
나는 정년 퇴임 후 언젠가 내 제자들과 함께 외국여행을 한번 하고 싶었다. 몇 년을 벼르다 작년 대마도여행의 느낌이 너무 많아 대마도를 선택하게 됐다. 지금은 문화 정치 경제적으로는 망각된 섬이지만 그 역사의 길을 더듬어 가면 시국에 비추어 애국을 일깨워 줄 수 있는 아주 좋은 교육 현장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의 전진기지였던 대마도에는 세이잔지라는 사찰이 있다. 조선의 통신사였던 김성일이 풍신수길을 만나러 갈 때 거처했던 곳으로 그 마당에는 그의 추모비가 있다. 그 옆에는 중으로 위장하여 조선 8도의 도로를 그려 풍신수길에게 바치고 임진란때 종군한 세작 겐소의 묘비가 있다. 왜일까? 대마도 도주에게서 선물로 받은 조총 2정을 조정에 바치고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고한 황윤길에 대한 흔적은 없다. 임란이후 국교가 재개되어 260년 동안 조용했던 시기에 500명에 달하는 조선통신사를 맞이하는데 많은 경비를 쓰며 초호화 접대행사를 벌렸던 것은 국서교환과 일종의 유학의 가르침등 배움의 축제였는데 양국으로부터 이득을 챙기기 위해 문서를 위조하면서까지 이것을 주선한 것이 바로 대마도주였다. 1840년까지는 대마도인이 먹고 산 조선 쌀이 74%나 되었다. 조선 없이는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