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년 퇴임 후 언젠가 내 제자들과 함께 외국여행을 한번 하고 싶었다. 몇 년을 벼르다 작년 대마도여행의 느낌이 너무 많아 대마도를 선택하게 됐다. 지금은 문화 정치 경제적으로는 망각된 섬이지만 그 역사의 길을 더듬어 가면 시국에 비추어 애국을 일깨워 줄 수 있는 아주 좋은 교육 현장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의 전진기지였던 대마도에는 세이잔지라는 사찰이 있다. 조선의 통신사였던 김성일이 풍신수길을 만나러 갈 때 거처했던 곳으로 그 마당에는 그의 추모비가 있다. 그 옆에는 중으로 위장하여 조선 8도의 도로를 그려 풍신수길에게 바치고 임진란때 종군한 세작 겐소의 묘비가 있다. 왜일까? 대마도 도주에게서 선물로 받은 조총 2정을 조정에 바치고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고한 황윤길에 대한 흔적은 없다.
임란이후 국교가 재개되어 260년 동안 조용했던 시기에 500명에 달하는 조선통신사를 맞이하는데 많은 경비를 쓰며 초호화 접대행사를 벌렸던 것은 국서교환과 일종의 유학의 가르침등 배움의 축제였는데 양국으로부터 이득을 챙기기 위해 문서를 위조하면서까지 이것을 주선한 것이 바로 대마도주였다. 1840년까지는 대마도인이 먹고 산 조선 쌀이 74%나 되었다. 조선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역이 단절됐던 고려말 왜구침범이 500회에 달했고 이조 건국이후에도 이어져 세종때 이종무 장군이 정벌해 경상도에 귀속시켰던 일이 있었다.
조선통신사 일행이 지나가던 그 길엔 아랫도리를 벌거 벗다시피 한 왜인들이 조선관리들을 말이나 가마에 태우고 모셨다. 그 행렬이 채색된 유리그림이 이즈하라 항구에 이르는 냇가 난간에 고정 설치되어 있다. 원본은 당시 일본 화공들을 동원해 그린 것으로 민속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그 옆에는 “대마도는 일본 고유의 영토다”라고 쓰인 방위청의 푯말이 붙어있다. 이 모두 무슨 의미인가. 처음 갔을 때에는 역사의 숨결을 따라 걷는 듯 했으나 다시 보니 대마도발전진흥회가 돈벌이를 위해 만든 무대가 아닌가.
경작면적이 3%밖에 안 되는 산악섬의 생존문제는 찾아드는 99%의 한국인 관광객에 달려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매년 8월이면 이즈하라 항구의 기초를 이룬 도주 종의진을 기념하는 축제가 열렸는데 흥행이 잘 안되어서 역사적으로 가장 깊고 오래된 한국을 끌어들여 1992년부터 조선통신사행렬을 모방한 아리랑 마츠리를 열고 있다. 국내 모 정치인들을 정, 부사로 분장시켜 가마에 태워 시가행진을 시켜 한국관광객을 유치하여 아리랑 마츠리가 원래의 축제였던 것처럼 위장하고 있다. 상술의 극치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예전에도 조선통신사요원들이 거들먹거리다 나중에는 일본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는데 어리석은 의원님들이 자기가 대접 받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여론이다. 어쨌거나 금년은 대마도에서 불상을 훔쳐갔다고 행사를 안했다지만 정말일까. 대마도 산길을 지나다보면 아베의 선전 포스터가 여기 저기 보였다.
한때 대원군치하에서 공조판서를 지냈던 최익현이 을사조약후 의병활동을하다 포로가 되어 대마도에 잡혀와 1906년 순국했다. 그의 영정이 수선사란 절에 보관되어 있다. 시주와도 상관이 있다는 것을 의심케 한다. 일본이 주는 음식은 않먹겠다고 해서 아사했다는데 일본은 병사했다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또 하나의 현장이다. 영정을 모시시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1274년 여몽연합군이 일본침공의 길목이었던 대마도 고모다하마에 상륙했을때 제2대도주 종조국도 전사했고 왜병 7000명이 희생당했다. 그 자리에 원혼을 달래는 평화의 비가 서 있다. 일본인들은 곧 잘 평화라는 이름의 가면으로 위장한다. 태풍 가미가제로 2회의 본토정복이 무산된 것이 아쉽기만하다.
히다카츠항구에 인접한 도노자키는 세계 최강 러시아발틱함대를 격파해 일본을 5대강국으로 뛰어오르게 된 성전지로 알려져 있다. 1905년 러시아와 일본이 대한제국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운 최후의 결전장이 된 바로 대마도, 이곳에 대형 전승조각비가 있다. 그때 러시아가 승리했다면 우리나라는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게 되었을까?
이즈하라의 뒷골목에 가면 춘향전을 읽고 감명을 받아 일어로 번역해 자유연애사상 작가로 유명해진 나카라이 토수이의 생가가 있다. 의사인 부친을 따라 초량왜관에서 살아 한글을 익힌 그는 일인의 외교관례를 무시한 항의계시문을 일어로 번역해 주었고, 임오군란을 보도한 후 기자가 되기도 한 평화주의자로 알려졌는데 그가 지도한 여류작가 히구치 이치요는 5000엔짜리 화폐의 인물로 등장했다. 춘향전이 이치요를 일본 화폐의 인물로 등장시킨 도우미가 된 셈이다. 그곳의 유물전시장엔 일본이 최상위에 있고 그 밑에 한국, 중국으로 뒤집어진 이상한 지도가 한 장 붙어있다. 무슨 의미일까?
외국어가 사람 사는데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또 한 사람의 예를 들어보자. 임진왜란 후로부터 명치유신사이의 평화로운 시기에 87세를 살았던 아메노모리호슈는 대마도 외교담당문관으로 왜관에서 한글을 익혀 대마도에 돌아와 한글학교를 세우고 조선과는 정성과 믿음으로 이어가야한다는 내용의 교린수지란 책을 한글과 일어로 써낸 유학자로 알려진바 있다. 조선통신사를 수행한일도 있고 박물관에 소장된 행렬도에 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1990년 노태우대통령이 일본궁중만찬 연설에서 아메노모리호슈의 상호존중과 이해를 거론했다고 한다.
외국어 능력에 얽힌 이야기가 많다. 대마도 한어학소에서 한글을 배우고 동경외국어대학을 나온 국분상태랑이란 자가 있었다. 1904년 이등박문의 통역관 겸 비서로 조선에 진출한 후 을사보호조약과 한일합방문을 초안하여 궁내부차관까지 진급하였고 이완용과 손잡고 조선탄압의 선봉에 섰으나 62세에 죽어 국분사 뒷산 가파른 언덕 묘지안에 묻혀있다. 묘비에는 이완용 친필의 “종3위1등국분상태랑지묘 - 후작 이완용서”란 매국비가 남겨져 있다.
임진란 이전 이즈하라 서산사에서 일승려 세작 겐소와 친분을 쌓았던 조선의 통신사 김성일의 비.
김영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