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의사로서 나는 행복한가?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우리 모두는 그다지 능숙치 못하다. 우리의 마음은 그 자체가 안고 있는 문제를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기에, 다소 인위적인 성찰 없이는 그 내면의 상태를 명쾌하게 규명하기 어렵다. 이때 우리는 철학이라는 소중한 수단의 도움을 받게 된다. 철학의 임무는 우리 각자가 원인 모를 불행과 우울을 해석하도록 도와주고, 그 해석에 기반하여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역사속의 수많은 철학자들 중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몰두했던 분으로서 나는 주저없이 에피쿠로스를 꼽는다. 쾌락주의라는 사조를 열었던 에피쿠로스는, 인생의 의미를 “쾌락을 느끼는 것”으로 정의할 정도로 만족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 힘썼다. 기존의 철학자들이 정신적인 것에 몰두하느라 금욕을 강조했던 것과 다르게 에피쿠로스는 감각적인 쾌락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쾌락이 행복한 삶의 시작이자 목표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쾌락 그 자체를 추구했던 에피쿠로스는 실제로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살았을까? 결코 아니다. 에피쿠로스의 삶은 일반인의 관점에서 금욕주의자들의 삶과 크게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절제되어 있었다.
치과의사로서 살다 보면 수많은 난관에 봉착한다. 고약한 진상 환자가 등장하여 터무니없는 이유로 날마다 치과에 드러눕는 경우도 있고, 손버릇 나쁜 데스크 직원을 만나 상당한 금액을 횡령당하는 경우도 있으며, 얌체 같은 건물주를 만나 잘 꾸려 놓은 치과를 통째로 날리는 경우도 있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안정적인 일상을 누리기 위해서는, 동일한 좌절의 상황 속에서도 최소의 체감을 느끼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굳건한 정신을 갖추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한데, 바로 이 부분에 있어 해결책을 조언하는 철학의 사조로서 나는 주저 없이 금욕주의를 꼽는다. 스토이시즘(금욕주의)의 거두 세네카는 거대한 재앙 또는 비극 앞의 인간의 운명을, 예측 불가능한 경로로 주행 중인 마차에 묶여 있는 개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개는 목줄이 허용하는 만큼의 자유를 자의에 의해 누린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리고 우연히도 개가 가고자 하는 길이 마차의 주행방향과 같았을 경우, 개는 무한한 효능감을 느끼며,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확신이 들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마차의 움직임에 귀속되는 것은 묶여 있는 개의 숙명이다. 마차의 방향이 개의 의지와 달라지는 순간 개는 마차에 저항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