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싱한 것들 해와 달과 별들이 싱싱한 것은 시시때때로 구름으로 닦으며 밤과 낮을 분명하게 가르고 모두에게 봉사하기 때문이다 바람이 싱싱한 것은 산과 들과 바다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스쳐도 맑게 보이기 때문이다. 눈뜨면 들어온 탐욕 가슴에서 쓸어내리고 눈물로 참회하는 일 흘린 만큼 싱싱하다 내 마음 흐물거릴 때 남들이 던진 돌덩이로 내 가슴이 철렁이는 순간 그 풍파도 싱싱했다. 김영훈 -《월간문학》으로 등단(1984) -시집으로 《꿈으로 날으는 새》, 《가시덤불에 맺힌 이슬》, 《바람 타고 크는 나무》, 《꽃이 별이 될 때》, 《모두가 바랍니다》, 《通仁詩》 등 -대한치과의사 문인회 초대 회장
박용호 원장 박용호 치과의원 원장 대한치과의사문인회 회장(전) 한국문인협회 회원 치과신문 논설위원 치의학 박사 수필집 《와인잔을 채우다》 5년 전 어떻게 아시고 중1 때 영어 선생님이 찾아 오셨다. 호마이카 선생님. 노총각 대머리가 가구처럼 빛나 붙은 별명이었다. 교장을 끝으로 퇴직하셨다. 70대 중반 왜소하지만 단단하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부천에서 승용차 몰고 오셨단다. 끝의 어금니가 한 개 흔들리는 것 제외하곤 건강한 편이라 다시 한 번 놀랐다. 마모증 치료와 치석 제거를 하고 主訴인 동요치는 그냥 더 사용하시도록 권유했다. 선생님의 교육방식은 독특했다.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자 몸짓으로 연신 몽둥이를 휘두르며 발음 고저와 강약을 지도했다. 영어 한 과가 끝나면 무조건 외어야 했다. 공포의 암기검사 날이면 회초리를 들고 단체 암송을 시킨 후 교실을 누볐다. 입 모양 보고 버벅대는 학생들에게 여지없이 머리통을 내리쳤다. 학기 말에는 책거리로 영어 암송대회가 열렸다. 그는 ‘개념 있는’ 선생님이었다. 중2 여름방학, 만리포로 단체 해양훈련을 갔다. 저녁 백사장에서 급조된 긴 상 깔고 식사 중이었다. 그때 걸인이 나타났다. 아무 말 없이 갑자기 시커먼 영상이 우
박용호 원장 박용호 치과의원 원장 대한치과의사문인회 회장(전) 한국문인협회 회원 치과신문 논설위원 치의학 박사 수필집 《와인잔을 채우다》 북핵으로 긴장 상태가 고조된 요즘, 작가 황석영의 <한씨연대기>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소설 속 주인공 한영덕은 6.25전쟁 전 평양의전과 교토대를 졸업하고 모교에 재직하던 산부인과 교수였다. 전쟁이 터지자 성격이 올곧고 초연한 그는 당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의무군관 차출에서 제외된다. 동료 교수 서학준의 잠적에 묵인했다는 이유로 사형 위기에 몰린다.(서학준은 남하하여 수도육군병원의 군의관이 된다.) 천신만고 끝에 홀로 피란한 그는 아들을 찾으려고 미군 부대를 배회하다가 간첩으로 오인되어 고초를 겪는다. 납북된 경찰관 미망인과 재혼도 하고 호구지책으로 무면허 업자와 동업하지만 양심적인 의술 이외에는 융통성도 없고 현실타협을 못 한다. 치과의사도 연루된 주변인들의 고발에 의료법 위반을 빌미로 정보대에 구금된다. 집행유예로 나오지만 고용의사로 떠돌다가 알코올 중독되어 적산가옥에서 독거노인으로 마지막을 고한다. 이 소설은 북한 의사가 남한에 와서 겪는 생사고락을 서술했는데 만약 남한이 베트남화 되면 남한 의사들은 어
나무들의 편지 별들이 은하수에 몸을 씻고 우리들의 머리에 빛날 때 나무들은 맑은 정신으로 세상 다독이는 편지를 쓴다 심장에서 우러나오는 빛깔로 꽃 피워 열매를 맺던 일 그간의 사연을 이파리에 물들인 아름다운 엽서를 지상에 띄운다 모두 다 헌신적으로 이 땅을 가꾸자는 뜻 한 장씩 띄워 보낼 때마다 나무는 더 곧아진다 바람 타고 오는 낙엽들 자연을 사랑하는 편지 나무는 그대로 세워두자고 가랑잎 소리로 속삭인다. 김영훈 -《월간문학》으로 등단(1984) -시집으로 《꿈으로 날으는 새》, 《가시덤불에 맺힌 이슬》, 《바람 타고 크는 나무》, 《꽃이 별이 될 때》, 《모두가 바랍니다》, 《通仁詩》 등 -대한치과의사 문인회 초대 회장
박용호 원장 박용호 치과의원 원장 대한치과의사문인회 회장(전) 한국문인협회 회원 치과신문 논설위원 치의학 박사 수필집 《와인잔을 채우다》 개원 초창기 겨울, 아침 출근 시의 나는 사뭇 로마 원형경기장에 등정하는 검투사 심정이었다. 파카 잠바, 모자, 장갑, 안경, 넥타이, 귀마개로 중무장한 후 스님의 말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一日不作 一日不食)”를 되새기며 나섰다. ‘오늘은 또 어떤 환자와 맞서게 될까? 칼과 창 대신 한 손에 핸드피스 한 손에 미러를 들고 유효적절한 언사를 날리며 적시타를 터트려야 할 텐데…….’ 오전 대기실에 그득했던 사자들을 다 처치하고 나면 입은 마르고 허기지고, 그냥 ‘하키코모리’이고 싶었다. 환자 많은 게 죄였다. 그땐 다 그랬다. 누구와 점심같이 하자고 전화할 여유가 없었다. 단골 칼국수집은 혼면을 하며 환자 진료를 복기하고, 반성하고 후회하는 한 시간의 도피처였다. 세로토닌이 분비되고 오후 이차전에 대비한 자가 치유의 시간이었다. 그러다 여기저기 감투를 맡게 되었다. 매주 도시락 조찬모임이 있는 날이 있었다. ‘말하며 듣고 생각하며 먹는’ 주요행위를 동시에 수행하는 것은 생리에 거슬렸지만 요령을 터득하는 공부
무인도 보는 사람이 외롭지 무인도가 외로운가 새들이 춤을 추며 놀아 주고 늘 파도와 함께 속삭인다 뱃고동 소리 되받아 주고 폭풍이 와도 감싸 주는 당찬 나무들이 가득 찬 섬 사람 없는 곳이 무공해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육지나 새들이 모여 사는 무인도나 떠들어 시끄럽기는 마찬가지 어느 곳이 더 요지경 속인가 잠깐 살다가는 생명들 육지도 외롭기는 마찬가지 이따금 눈길이 쏟아지는 섬 무인도는 외롭게 보일 뿐. 김영훈 -《월간문학》으로 등단(1984) -시집으로 《꿈으로 날으는 새》, 《가시덤불에 맺힌 이슬》, 《바람 타고 크는 나무》, 《꽃이 별이 될 때》, 《모두가 바랍니다》, 《通仁詩》 등 -대한치과의사 문인회 초대 회장
박용호 원장 박용호 치과의원 원장 대한치과의사문인회 회장(전) 한국문인협회 회원 치과신문 논설위원 치의학 박사 수필집 《와인잔을 채우다》 지난겨울, 고등학교 동기회장이 긴히 의논할 일이 있다고 치과로 연락을 해왔다. 전화로는 안 되고 굳이 점심때 찾아 오겠단다. 대학 부총장으로 바쁜 그가 전 동기회장(그도 신협 이사장으로 분주하다)과 대동했다. 요지인즉 우리 기수가 고교 총동문회장을 맡을 차례인바 내가 적임자라는 것이다. 사실 수입차 사장과 중견기업 사장 동기 두 사람이 물망에 올랐는데 그들이 고사하니 나에게 밀려온 것이었다. 뜻밖이었다. ‘아……. 감투가 이렇게도 흘러오는구나’ 능력‧재력‧체력‧시간이 필요한 큰 자리다. 유력한 관직이나 사업가 선배들이 역임했던 막중한 직책이다. “나를 생각해준 것은 영광이지만 못하겠다. 새벽 골프도 끊었고 술도 못한다.” “그건 본질이 아니잖아~” 옹립위원회를 만들어 돈 낼 사람 술 대신 먹을 사람 내세울 테니 걱정 말란다. 그래도 그게 어디 그런가?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내 말에 그들은 삼일만 더 생각해 보라며 돌아갔다. 그즈음 박 대통령 기소로 전국이 시끄러웠고 촛불ㆍ태극기 시위로 떠들썩했다. 감투 비리를 둘러싼 초유
등굽은나무 길가에 서서 한평생 흘려보낸 등 구부린 우람한 정자나무 검푸른 잎마다 활짝 펴 잠시 쉬어가라 한다 가지 끝으로 뻗어나는 여름 새들과 이름 모를 벌레까지 모여 맨몸으로 노래하며 악단 이룬 이 나무 그늘에 내 땀은 잦아든다 곧은 나무들은 다 어디로 가고 긴 세월 혼자 지켜온 이 자리 등 굽은 정자나무 아래 다가서면 모두가 허물 가린 길손이 된다 나는 이제까지 멀쩡한 몸으로 누구에게 즐거움 주었으랴 수많은 사연 등에 건 이 정자나무 우러러보고 다시 떠난다. 김영훈 -《월간문학》으로 등단(1984) -시집으로 《꿈으로 날으는 새》, 《가시덤불에 맺힌 이슬》, 《바람 타고 크는 나무》, 《꽃이 별이 될 때》, 《모두가 바랍니다》, 《通仁詩》 등 -대한치과의사 문인회 초대 회장
박용호 원장 박용호 치과의원 원장 대한치과의사문인회 회장(전) 한국문인협회 회원 치과신문 논설위원 치의학 박사 수필집 《와인잔을 채우다》 아는 후배로부터 급히 연락이 왔다. 60대 환자 단순 발치를 한 개 했는데 며칠 후 상태가 급속히 악화되어 대학병원 구강악안면외과를 거처 감염내과에 입원했다고 한다. 원래 신장과 심장에 기저질환이 있었는데 바이탈마저 우려되었다가 고비는 넘겼다고 한다. 환자 가족들이 몰려와서 항생제 처방을 안 해줘 이 지경이 됐다고 여러 차례 난리를 쳤단다. 후배는 멘붕 상태였다. 나는 환자가 사망 안 했으니 다행이고 배상은 보험사에 맡기면 되니 행패엔 담담히 대처하라고 일러두었다. 발치는 치과의사라면 매일 밥 먹듯 하는 안전한 수술이다. 중국 오지의 발치사(치의 없는 지역에서 발치만 전문으로 하는 기능사)가 완전 멸균 안 된 기구로 시술하고, 남미에선 토픽뉴스에 나올 정도로 진료 봉사 때 동산만큼 발치를 해도 큰 문제가 없다. 치의에겐 진료의 중심이고 그 자체로 생명의 근원이던 치아가 수(壽)를 다해서 악의 근원이 되면, 발치할 때 그렇게 신날 수가 없다. 사자의 마음과 여우의 말과 원숭이 손으로 소임을 마치면 조폭 두목 잡은 검사의 기
내왕국에 마당에 새떼가 날아와서 빛나는 눈빛과 알 수 없는 언어로 이 땅의 주인처럼 나의 존재에 끼어들고 있다 구름 속에 숨어 산을 넘고 바람 타고 강 건너온 무리 내가 왕이고 싶은 내 땅과 내 나태를 잽싸게 낚아챈다 새들이 짝지어 부르는 노래 사랑의 연극같이 보이지만 시시때때로 지쳐 울부짖는 내 속내보다 즐거워 보인다 나를 점령하고 깃발을 높이 펄럭이며 식민지가 된 내 마음에 사랑의 등불 켜놓고 간다. 김영훈 -《월간문학》으로 등단(1984) -시집으로 《꿈으로 날으는 새》, 《가시덤불에 맺힌 이슬》, 《바람 타고 크는 나무》, 《꽃이 별이 될 때》, 《모두가 바랍니다》, 《通仁詩》 등 -대한치과의사 문인회 초대 회장
세상의 모든 꽃들이 다 결실을 맺을 필요는 없다. 꽃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더구나 자신과 같은 비숙련자가 - 비록 식물이라고는 하나 종자를 남길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거창한 다른 개체의 문제에 관여하는 것도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A는 더 이상 자신에게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인공 수정에 실패하면 리톱스 화분도 다시는 보지 않게 될까. 아버지의 무심한 목소리가 파동이 되어 조용히 허공을 갈랐다. A는 그 파동에 자신이 쨍하니 울리는 감각을 느꼈다. 손가락 사이로 열심히 노란 꽃술에 붓질하던 자신의 모습이 물결처럼 일그러지다가 이내 사라졌다. A는 초등학교 운동회 때 자신의 딸을 데리러 왔던 B의 아버지가 생각났다. 운동회 날, A의 어머니는 멀찍이서 양산을 쓰고 서 있던 B의 어머니에게 여기 와서 같이 앉자고 말했다. A는 어머니 옆에 앉아 있다가 B의 어머니가 다가오자 좀 더 구석으로 당겨 앉았다. B의 어머니는 눈인사를 하며 돗자리에 앉았고 A의 어머니와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새 보니 마당에서 고추를 말리던데 고추 농사도 짓는지 몰랐다, 그런 이야기를 A의 어머니가 했던 것 같다. 그런데 B가 달리기를 하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