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환, 윤형주, 그리고 송창식이 함께하는 자칭 빅3콘서트 아주 우연한 기회에 아주 절친한 지인으로부터 20년전으로의 시간 여행을 초대받았다. 김세환, 윤형주, 그리고 송창식이 함께하는 자칭 빅3콘서트는 시계바늘을 20년쯤 전으로 돌려놓은 시간이었으며 불러지는 노래 한 곡 마다 사연이 있었고 노래마다 추억이 어려 있었던 애창곡 모음집같은 무대이고 그때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였다. 입장 할 때부터 대충 알만한 사람들이 부부가 함께 한 모습으로 눈에 많이 띄는 것만으로도 그 시절로 돌려 놓은 듯 하였고 김세환은 ‘길가에 앉아서’나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좋은걸 어떡해’ 등 이런 노래로 울고 웃었던 70년대의 아릿한 추억을 끊임없이 반추하게 하였다. 더구나 근래에 나훈아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영 영’이라는 노래를 불러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청중들의 지금의 심정을 대변하기도 하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이제 밤도 깊어 고요한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이 밤이 지나가면 나는 가네 그대 아닌 사람에게로... 내 원치 않는 사람에게로’하며 부르던 ‘웨딩 케익’이라는 그 유치찬란한 가사들이 왜 그 시절에는 그처럼 가슴에 와 닿고 어디에서든지 읊조리게 하던 곡
鬪牛 리영달(作) ’59 서울치대졸업 ’90 개천예술제 대회장 대한민국 사진전람회 초대작가 심사위원 사진작가협회 운영자문위원 진주 리영달 치과의원 원장
동해 바다에서 너무 추워 손이 얼어 고생했던 일, 해뜰 때를 맞추어 물속에 들어 가려고 새벽에 바다에서 기다리는 시간들, 무거운 장비와 카메라 때문에 조금만 걸어도 숨이 턱까지 차 오르고 허리는 끊어질 듯한 아픈 기억들, 높은 파도에서 시달리던 일들.... 지난해 7월말에는 제주도에서 일주일 동안 여름휴가 겸 제주수중사진촬영대회에 참석하였다. 가족들과 3일 동안 보내면서 서귀포 섶섬, 정방폭포 앞바다, 외돌괴 앞에서 다이빙을 했는데, 같은 배에 탄 일행 중 한 분은 봄부터 문어만 비디오 촬영을 해 올 초‘문어의 모정’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든 매니아도 있었다. 원래 삼성 사내방송국에 근무하다가 요즘은 개인 스튜디오를 차려 방송국에 필름을 제공하기도 한다는 그분은 취미가 직업으로 바뀌어 버린 대표적인 경우가 아닐까한다. 제주수중사진촬영대회에 참가해 받은 금상과 부상으로 필리핀 리조트에서 제공한 항공권, 다이빙 여행권으로 올해는 다시 필리핀 아닐라오를 가려고 계획중이다. 지난해 10월에도 몇 번 더 제주를 찾았다. 우리나라 바다에서 편안하게 스쿠버 다이빙을 즐길 수 있고 가장 아름다운 물속 비경을 지닌 곳은 제주 서귀포 앞바다라고 생각한다. 계절 중에는 10월,
해저의 신비 김광회(作) ’92 단국치대졸 스쿠버다이빙 강사 “해저여행” 잡지 편집인 현재 수원 김광회치과 원장
나는 아직도 개그맨이 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살고 있다. 헤헤.. 이글 대충쓰고 얼른 김응룡감독 흉내내는 것 연습해야지. 내 꿈은 개그맨이 되는 것이다. 누에에게도 나비가 될거라는 희망은 있듯이 물론 아직도 포기하지는 않았다. 대학시절부터 그렇게도 개그맨 콘테스트에 나가보고 싶었지만 지방대학에 다녔기 때문에 방송국 소식을 접하기가 어렵기도 했고, 무엇보다 용기가 없어서 한번도 나가보지 못했다. 기껏해야 강호동이 진행하는 KBS 캠퍼스 영상가요에 덩달이식 말장난으로 2분 11초 출연한 것이 전부였다. 혹시 본 사람은 기억이 날지도 모르겠다. 끝낸다고 주머니에서 끈꺼내고, 무대를 망쳐버린다고 모기장들고 왔다갔다하고, 강철못 부러뜨린다고 결국 못 부러뜨리고는 강철 못 부러뜨렸다고 하고 했다. 그러던 나에게 기회가 왔다. 작년여름에 개그맨 김학도의 사촌동생인 친구가 서울에 김학도네 집에서 살고있다고 놀러오라고 한 것이다. 그 집에는 개그맨 차승한도 같이 살고 있었다. 물론 김학도와 차승한이 개그맨이야? 라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름대로는 먹고살만큼 벌면서 살고 있다. 부연설명을 붙이자면 둘다 MBC 출신인데, 차승한은 신문선씨 흉내를 내는 ‘신문지’로
새벽 물안개 전석열(作) ’59 : 전북 임실군 청웅 출 ’84 : 경희대 치과대학 졸업 ’94~5 : 서울‘광영회’ 회원전 출품 ’94~현재 : 대전광역시 치과의사회‘THE IMPRESSION’회원 ’94 : 현대미술대전 사진부문 금상 ’95 : 동아국제사진싸롱, 대전일보국제사진전등 사진공모전에서 다수 입상 및 입선 ’97. 9 : 대전시민회관 개인 ’97. 9 : 청웅 전석열사진집 발간 25㎝×25㎝ -84Page ’2000~: 대전광역시 치과의사회 사진동우회장 대전 예치과의원장
치열하고 숨가쁜 서울의 삶이 고달파지면 조용하고, 느긋했던 고향 시골집이 그리워진다. 대개 젊은 시절에는 도시 생활을 좋아한다. 거대한 빌딩과 화려한 쇼 윈도우가 주는 부와 성공에 대한 예감 때문에 도시를 떠날 수 없다. 도시 속에서 숨가쁘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함께 행동해야 안심이 된다. 복잡하고 메마른 미국의 거대도시 뉴욕의 중심지 맨하탄에 살고있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똑같이 흉내내면서 서울거리를 바쁘게 뛰어다녀야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사실 젊을 때는 자기분야에서 열심히 일해서 성공해야 한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고, 그런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도심 안에 살아야만 한다. 도시가 주는 문명과 문화의 혜택을 누리며 경쟁력 있게 살 수 있고 도시만이 줄 수 있는 다양하고 활기찬 생활을 통해 수많은 기회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을 때는 거대한 도시가 내뿜는 매연과 소음과 쓰레기더미가 보이지 않는다. 현란한 네온싸인이 꺼지고 장식물 같은 인간들이 다 떠나고 나면, 도심의 거리는 마치 화장기를 닦아낸 늙은 작부의 모습과 같다. 그렇지만 젊을 때는 그 도심의 거리가 좋다. 그곳에 있어야만 자신의 실존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
5월 나들이> 김태진(作) ’77 경희치대 졸업 경기치원 편집위원 ’98,9 인사동 백송 화랑 ‘ 해너미 사진전’ ’99,12 인사동 경인미술관 ‘ Y-Photo 사진전’
10년의 세월 속에서 그녀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높이뛰기를 했었고 그 것이 제대로 성공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 대상은 아주 작고 약한 쪽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만다. 1992년 임신 8개월의 그녀의 출근 시간은 아침 7시 20분, T시내에서 30분 가량 차를 타고 나가서 다시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50분 가량을 가야한다. 그렇게 도착한 그 곳에서 택시를 타고 10분 가량을 더 가야만 직장인 K보건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녀는 여자에게 자신의 인생에서 8개월의 순간은 짧을지 모르지만 몸이 바람을 불어 넣으면 넣을수록 불어나는 풍선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이 임신체험은 쉽게 지워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흰색 가운 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5평 남짓한 그녀의 방에는 치과 체어 2대, 그녀와 간호원 책상 그리고 X-ray기가 전부였다. 출퇴근 시간이 유난히 긴 관계로 그녀가 아침을 신선하게 시작하기에 그녀의 몸은 너무 오래 도로 위에 있었고 한 잔의 따뜻한 커피를 일기 쓰는 진지한 자세로 마시는 것도 사실은 별다른 의미 없는 그녀의 버릇일 뿐이다. 그녀가 보건소라는 직장에 만족하는 것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소래 최용묵(作) ’43 경성치과 의학전문학교 졸업 경성치학전문학교부설병원 치과 근무 ’71 아마추어스케치대회 미술 협회장상 ’80 제1회 개인전(서울신문사 갤러리) ’83 사단법인 한국 일요화가회 회장 ’90 제2회 유화전(신세계 백화점 화랑)
"서러우면 열심히 공부해라! 아플 시간이 어디있냐?" 학교 종이 땡! 땡! 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학교에 가기를 즐거워하는 학생들의 모습과 이들을 반기는 선생님의 사랑이 가득한 학교에 대한 애정이 듬뿍 들어있는 노래이다. 요즈음 학교를 떠나려는 아이들이 늘고있는 현실을 보면 나의 아이도 이들 중의 하나는 아닐까 하는 불안함과 함께 답답함을 느끼며 우리 나라의 장래를 이끌어갈 세대의 이러한 모습은 우리를 안타깝게 만든다. 공중보건의를 마치고 개업 초에 초등학교로 구강검진을 나간 적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한지 15년이 지난 후의 초등학교의 모습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고 한 학급의 50여명의 복작 되는 아이들의 모습도 낯설지 않았다. 선생님의 통솔에 아랑곳하지 않고 재잘재잘 되는 아이들, 이를 정리하기 위해 반장의 도움을 구하며 애쓰시는 선생님, 아마 내 아이도 조금 더 크면 장차 이들 중의 하나가 되어 있으리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한 학급에서 선생님의 통솔을 보며 장차 내 아이에 대한 불안함이 일어났다. 함께 떠들고 왔다 갔다 하는 아이들 중에 어떤 아이에게는 매우 관대하고 나긋한 어조로 타이르시고 다른 한 아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