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초절정 미성 작렬 댄스 N 발라드 가수 리안의 새 노래가 나왔어요!” “오오 축하드려요!”… “대박 기원합니다!”… “역시 언제나 멋지세요!!!”… “노래는 너무너무 좋아요! 그런데…”… “아 다 좋은데 가수가 쫌….”… “가수가…”… “가수가…”… “가수가…”… 아니 이 사람들이 진짜, 내 목소리가 어디가 어때서 자꾸 가수가 문제라는 거지? 음정 좋아, 박자 좋아, 감정 좋아, 게다가 내가 나름 싱어송라이터잖아? 가사 좋아, 멜로디 좋아, 반주 좋아, 게다가 내가 또 나름 괜찮게 생겼잖아? 눈도 두 개, 귀도 두 개, 이빨도 스물 몇 개, 아니 도대체 가수가 뭐가 문제라는 거냐고… 응? 응? 이것 참, 갈수록 삐딱해지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네. 뭔가 본때를 보여줘야 되겠는데, 어떻게 하지? 보란 듯이 빌보드 챠트 1위에 올라서기만 하면 그놈의 가수 자질 논란 따위, 한방에 날려버릴 수 있을 텐데 이게 당최 쉽지가 않네. 오또카지, 오또카지, 오또카지… 아, 맞다! 돌아갈 길이 없다면 정면돌파하는 거지! 그래, 그럼 내 노래를 다른 가수들에게 부르게 해보자. 그것도 노래를 아주 아주 잘 부르는 친구들에게. 그러면 모두들 똑똑히 알 수 있게 되겠지
보건복지부가 치과의사 전문의제도에 대한 입법예고기간을 며칠 남겨두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생뚱맞게 입법예고안에도 포함돼 있는 ‘통합치의학과’의 명칭을 가정치의학과로 변경하려고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돼 파장이 일고 있다. 가뜩이나 치과계의 합의사항을 무시한 일방적인 정부의 전문의 입법예고에 대해 복지부 앞 항의집회, 임시대의원총회 개최 등 치과계의 반발이 거세게 일고 있는 상황에서 복지부가 또다시 무리하게 용어변경을 추진했다는 점이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복지부에서는 치과계에서 국민신문고 등을 통해 가정치의학과로 변경을 요구해 회의를 열었다고 하지만 치협과 아무런 사전 논의 없이 두 차례나 회의를 열고 일부 몇사람들의 의견만을 수렴하는 요식행위를 거쳐 명칭 변경을 추진하려는데 기가 찰 따름이다. 복지부는 치과계의 합의사항을 전적으로 무시한 채 정부의 입맛에 맞는 입법예고를 일방적으로 발표해 국민과 치과계 전체를 혼돈의 상황으로 몰아넣는 우를 범한데 이어 명분도 근거도 없이, 종합적으로 검토하지 않은 채 명칭 변경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통합치의학과라는 명칭은 복지부가 그토록 원하는 치과계 전체의 합의가 이뤄진 것이 분명함에도 복지부
Mongolia (I)에 이어… 새벽 1시 몽골 징기스칸 국제 공항을 떠난 버스는 영하 20도의 사막을 밤새 달려 옴노고비주 달란자드시 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6시.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간간히 눈을 비비며 좌우 창밖을 보았지만 끝없는 평평한 하얀 겨울사막외에는 보이질 않았다. 비몽사몽 몇 시간을 잤는지, 이시형 박사님께서 감탄사를 연발하며 나를 깨우신다. 눈을 떠보니, 내 눈 앞에는 끝이 보이지않는 사막 끝 지평선에서 이글이글 붉은 태양이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와아!! 하고 차 안에서 자던 모든 사람들은 동시에 감탄사,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대장관이었다. 몽골의 후예 징기스칸은 저 이글거리는 태양의 정기를 받으며 전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망을 불태웠으리라… 이렇게 가슴벅찬 광경은 처음 찍어본다고 KBS 촬영 PD님은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를 않고 셔터를 누르고 계셨다. 잠시 차에서 내려 사진을 더 찍고 싶었지만 아침 병원 개원식 시간에 맞춰 준비한 여러 공식 일정을 다 소화하려면 단 십분도 지체할수 없다는 주 정부 관계자 분의 양해를 들으며, 아쉽지만 차 안에서 맞은 사막의 여명으로 만족을 해야했다. 보통은 4시간 걸리지만 귀한 한국 손님들
지방 작은 동네에서 슬픈 哭聲이 들려왔습니다. 한 청년이 취업에 대한 고통 때문에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했는데, 마침 퇴근하던 군청의 한 공무원과 부딪혀 둘 다 사망한 사건입니다. 그 공무원은 어린 아들과 출산을 앞둔 만삭의 아내가 있는 젊은 가장이었기에 더 슬프고 안타까웠습니다. 마른하늘에서 날벼락 맞을 확률이 높을까요? 투신하는 사람과 부딪혀 생명을 잃을 가능성이 더 많을까요? 세상은 투신자살한 그 대학생과 사망한 공무원과의 묘한 악연을 탓하며 이러쿵저러쿵 말들을 많이 했습니다. 허나 어찌보면 그 젊은이 또한 피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취업에 대한 스트레스와 미래에 대한 불안이 얼마나 컸으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요? 자살한 청년의 남은 가족들은 또 가족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남의 가정에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는 생각으로 얼마나 미안한 마음으로 살아갈까요. 그가 고의적으로 한 일은 아니지만 결과는 너무나 비극적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아니면 어떤 악의 힘이 작용하여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 공무원의 장례식장에서 투신한 대학생의 유가족들이 공무원의 유가족들에게 무릎 꿇어 사죄했고 공무원의 유가족들은 사죄를 하는 유가족들을 일으켜 세우며
스케일링, 틀니, 임플란트 등 치과 주요 진료 항목들이 건강보험 급여화 되면서 치과도 건강보험시대에 돌입한 지 몇 년이 지났다. 특히 7월 1일부터 만65세 이상에 대한 틀니와 임플란트가 건강보험으로 적용돼 건강보험 보장성 연령이 더욱 확대됐다. 이에 따라 그동안 틀니 1악 또는 임플란트 1개를 시술할 경우 비급여로 평균 140~200만원을 부담해야 했으나 이번 급여 확대로 약 53~65만원만 부담하게 돼 환자의 의료비 부담이 약 60% 감소하게 된다. 이 같은 제도 변화와 함께 개원가가 실제로 과실을 따먹기 위해 몇 가지 고려할 점이 있다. 우선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에 따른 제도 변화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야 한다. 세부내용을 정확하게 숙지하고 있어야 심평원이나 공단으로부터 불필요한 삭감이나 제재 조치를 면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본지에서 보도되는 내용을 꼼꼼히 숙지하거나 치협에서 발행하는 치과건강보험 요양급여비용 책자를 활용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될 수 있겠다. 건강보험 제도권으로 들어오게 되면 환자가 부담해야 할 의료비를 의사 마음대로 면제해주거나 할인을 해선 곤란하다. 의료법 27조 3항은 국민건강보험법이나 의료급여법에 따른 본인부담금을 면제하거나 할인하
증오. 미국 전역이 증오로 들썩거렸던 한 주였습니다. ‘이슬람 전사’를 자칭하는 테러범에게 50여명이 사망하였고 그와 비슷한 수의 사람이 다쳤다고 합니다. 죽기 직전 공포에 질린 절망적인 상태에서 가족에게 보낸 작별의 메시지가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누군가의 아들 딸이며 사랑 받던 사람들이 허무하게 죽어간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이유만으로 말 한마디 섞어본 적 없는 누군가를 죽일 만큼 증오하고 죽고 죽이는 세상 입니다. 직접 폭력을 가하지는 않더라도 증오라는 감정은 미국 전역에 만연해 있는 듯 합니다. 트럼프라는 쇼맨십 뛰어난 정치꾼은 과거 히틀러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의 분노를 이용해서 대중에게 적을 만들어 주고, 자신의 지지자를 모아서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하려고 합니다. 모든 공약과 발언에 분노와 증오의 감정이 담겨 있습니다. 삶에 지치고 찌들려 있던 사람들은 이것에 열광하고 억눌러 왔던 불만을 마음껏 표출합니다. 얼마 전 이슈가 되었던 묻지마 범죄, 보복 운전 등을 살펴보면 우리나라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당장 인터넷만 들어가봐도 모든 기사에 분노가 느껴지는 댓글이 가득합니다. 예전에는 정
EU는 1951년 4월 18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6개 나라가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ECSC)조약 체결함을 모체로 시작 되었다. 영국은 1975년 국민투표 60%지지로 EU에 가입을 선택하였고, 가입 41년만에 EU 탈퇴(브렉시트)를 묻는 영국 국민투표에 “탈퇴” 51.89%, “잔류” 48.11%로 EU 간섭 없는 고립주의의 길을 선택했다. 한동안 가입국이 늘어나면서 EU는 순탄했으나, 2000년대에 들어 서유럽 국가들보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동유럽 국가들이 신규 가입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저렴한 동유럽의 노동력이 서유럽으로 몰려오면서 서유럽 국가 노동자들의 불만이 시작되었고, 동유럽 국가들은 자국의 우수한 인재들이 서유럽으로 빠져나간다고 또 다른 불만이 생겼다. 한편 경제기구 EU는 경제기구를 넘어 유사 통치 기구가 되니, 2009년 12월 1일 발효된 리스본 조약에 의해, 회원국을 통제하는 현재 EU가 되어 회원국은 분담금 등 의무사항이 생기니 ‘주권침해’라는 불만 반응이 나타났다. 거의 같은 시기인 이듬해 2010년 봄부터 시작된 유럽재정위기로 불협화음이 높았었다. 나름대로 소박하게 살던 남부 유럽의 가난한 나
내 어릴 적부터의 꿈은 의사와 시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제 이 두 꿈이 다 이루어졌으니 진정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기쁘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린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수어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삭스다.’ 헤르만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글이다. 나는 알을 깨고 나와야 했다. 그동안 의학(醫學)과 이과(理科)의 세계에 살아왔던 내가 그 세계를 탈피하여 새로운 문학의 세계로 태어나고 싶었다. 그리하여 시의 세계로 날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내 작은 글쓰기는 내 허물을 벗는 일, 알 껍질을 부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어 준 것 같다. 이제 비로소 나는 글을 쓰며, 더불어 나누고픈 작은 몸짓을 할 때마다 나는 머리를 조금 더 높이, 좀 더 자유롭게 치켜들어, 아름다운 맹금의 머리를, 산산이 부수어진 세계의 껍데기 밖으로 쑥 내민 것 같은 느낌이다. 가슴이 따뜻한 시인이 되고 싶다. 내 시를 즐겁게 읽어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를 위해 아름다운 시를 쓸 것이다. 줄탁동시(啐啄同時) 알속에 있는 병아리가 알을 깨기 위해
치협이 개원가의 심각한 보조인력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가칭)치과경영관리사를 전격적으로 도입키로 결정했다. 치협 치무위원회는 그동안 외국 사례 파악, 개원가의 설문조사,우송정보대학 방문 등의 치밀한 준비과정을 거쳐 전국에서 가장 먼저 대전에 있는 우송정보대학에 2017년 새학기부터 치과경영과를 신설해 학생을 선발하기로 교육부의 승인까지 받아논 상태다. 개원가에서 구인란은 갈수록 더욱 가중되고 있음에도 치과위생사와 간호조무사 등 숙련된 전문보조인력이 진료업무에만 전념하지 못하고 환자접수, 예약관리, 회계, 행정업무 등의 업무까지 떠맡고 있어 인력난은 더욱 가중되고 있는 상황이다. 더욱이 치과위생사 1명이 근무하는 상당수의 치과에서는 직원 혼자서 도저히 이 업무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처리할 업무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또한 일정정도 연차가 되면 임상업무 보다 데스크 담당 업무를 선호함에 따라 진료현장에 있는 전문인력은 채용하기가 하늘의 별따기가 돼버린 지 오래다. 이러한 개원가의 최대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치협은 내원 환자 접수에서부터 환자 관리, 구강검진 청구, 직원 채용 뿐만 아니라 정부 당국이 요구하는 각종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저는 특정한 종교는 없지만 신은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신은 우리네 인생 상당부분의 선택권을 묘한 방법으로 인간에게 넘겨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그 선택권중에서 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성경에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는 문구가 여러 번 나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에게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도 예수는 한마디로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왜 진부한 ‘사랑’ 이야기를 이렇게 자주 이야기하고 강조하는 것일까요? 힘들어도 우리네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며 살아야 세상이 평화로워지고 신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는 단순한 메시지를 던지는 것일까요? 개인적으로 치과 진료실에서 환자와의 상담을 즐겨합니다. 말을 하는 것을 천직으로 여기는 편이라 우울증이나 수면장애, 강박증등의 소위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들과도 많은 대화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재미난 사실은 제가 환자의 기구한 이야기속에 푹 빠져 있다가 마음이 울컥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환자분이 동시에 눈물을 흘리더라는 것입니다. 양자역학을 빌어서 표현하면 제가 의사라는 독립된 ‘입자’처럼 행동할 때는 서로 무덤덤하게 지나갔을 만한 일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은 농촌에 대한 기억들뿐이다.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서울시 구로구 천왕동 인근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지금의 천왕동은 고층 아파트와 지하철역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주거지역이지만 70년대 중 후반까지도 그 곳은 완전한 농촌지역이었다. 하루에 몇 번 없던 버스도 족히 이삼십분은 걸어나가야 이용할 수 있었다. 주위에는 산과 들 뿐이었고 딱히 재미있을 거리는 없었다. 누구나 지루하게 살았음직한 그런 시골동네가 나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특별한 기억의 장소가 되었다. 거의 40년 전 그 때의 그 장소로 나를 잠시 옮겨서 잊지 못할 기억들을 몇 가지 써보려 한다. 이 이야기는 마을사람들을 온통 분노와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나의 악행(?)에 대한 이야기 이면서 부모님께 드리는 반성문이기도 하다. 유리는 깨지는 물건이고 빗자루는 용도가 다양하다 때는 바야흐로 새마을운동의 시기, 아마도 여름이었던 것 같다. 모든 마을 사람들은 도랑을 넓혀서 관계수로를 확보하고 우물을 정비하고 토담을 이룬 초가집을 계량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당연히 나의 부모님들도 다른 분들과 함께 마을 바꾸기에 여념이 없었을 터였다. 혼자 남은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