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부산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개원한 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9년이 다 되어 갑니다. 작지만 나름 병원을 알차게 운영하기 위하여 임상은 기본이요, 경영에 대한 지식을 갖고자 여러 책을 두루 섭렵하려 노력하였고, 사람을 치료하는 직업이므로 치과의사로서 소양을 갖추기 위하여 여러 교수님과 선배들, 또한 저 자신에게 많은 질문과 해답을 찾기 위하여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매일 환자만 보다 보니 학창시절보다 웃음도 줄어들었고, 문득 뒤돌아보니 3만원이면 부산 아미동 시장통 분식집에서 순대와 오뎅, 막걸리로 대여섯 명이 거나하게 취할 정도로 마실 수 있었기에 행복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왜 갈수록 이렇게 삭막하게 변했을까 하는 의문과 알 수 없는 갈증에 목말라 했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데 이것이 정답인가? 많은 사람을 만나서 묻고, 알고 싶었으나 개원의로서는 한계가 많은 것 같았습니다. 또한, 후배들이 찾아와 병원 경영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물어보면 어설픈 지식으로 저 자신도 이해 못 하는 경제학 용어를 쓰면서 마케팅은 어떻고, 직원관리는 이렇게 해야 한다면서, 큰소리를 치곤 했지만, 정말 제대로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연대 경제대학원 최고경제 2기 동기회 (회장 최광철)는 2014. 7. 12. (토) 당일. 버스대절로 충북 괴산에 다녀온 바 있어서 아래와 같이 몇 곳을 소개합니다.1. 괴산 (槐山) :고구려때는(475년) 잉근내근, 신라때 괴양군, 고려때 괴주군, 조선 태종때 괴산군이라고 하였다. 괴(槐)는 느티나무 괴로서 수중지왕을 뜻한다. 또 회화나무, 홰나무 라고도 하며 영어는 Pagoda 인데 길상목으로서 저택이나 학교에다 많이 심는다. 빼어난 산수절경과 단아한 지역민의 인품을 반영한 느티나무는 억쎈줄기, 고르퍼진 가지, 단정한 잎으로 되어있고 의정부는 괴부, 왕이 있는 궁궐은 괴신 (槐宸), 외교문서 보관 승문원은 괴원, 높은 자리는 괴위, 괴정이라 했고, 3정승(삼공 三公) 지위의 높은 관직은 괴당이라고 하였다. 괴산군을 상징하는 새는 (Country Bird)는 까치 Magpie이며, 꽃은 봉숭아, 인구 3만8천여명, 1읍 10면, 공무원 600여명있다. 자연 관광은 화양구곡, 선유구곡, 쌍곡구곡, 갈은구곡, 35명산 등 있으며 체험관광은 멍딩이 마을, 둔율 올갱이 마을, 조령 민속 공예촌, 사기막리 산촌 생태마을 유원지는 수옥폭포, 수옥정, 정물 놀이장,
몽골의 전통 여름 축제인 나담축제가 시작되는 7월 초, 러시아풍의 고급 레스토랑 서울에는 200여명의 몽골 치과의사들과 일부 치위생사들, 치과진료조무사 등 치과계 식구들과 몽골정부 보건부 차관을 비롯한 의료제도 분야, 구강보건관련 관리들, 한국의 치과의사회 부회장과 간호조무사협회장 및 임원들, 그리고 이날 행사를 주도한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과 몽골치과의사협회 인사들이 참여하여 향후 몽골의 치과협조인력들에 대한 바람직한 활용(Dental Auxiliary Utilization)이란 주제로 대 토론회를 가졌다.지난 수 십 년 간 몽골은 정치, 사회, 문화 체제가 구 소련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 방식을 많이 따랐으며 30년전 까지만 해도 모든 학교(초,중,고가 함께 존재하여 1학년부터 11학년까지)에는 필히 학교치과진료실(School dental clinic)이 설치 운영되고 있었다. 물론 치과대학 교육도 변변치 않아 그 중 똑똑한 친구들은 모스코바에 유학가서 치과대학을 나왔지만, 대다수가 의과대학 치과학교실을 졸업하고는 정부가 지정한 보건소나 학교치과진료실을 담당하는 공공 치과의사로 근무하게 된다.그런데 1980년대 후 부터 몽골 세상이 바뀌었다. 자본주의가
군산에서 시작한 장애 아동 치과 진료가 전주로 치과를 이전 하면서 본격적으로 장애학교인 은화학교를 도맡아 봉사 한지 벌써 15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처음 귀여운 꼬맹이 손님이 치과에 왔을 때 여느 아이들과는 다른 행동을 보이며 진료를 힘들게 했지만 치료를 해 갈수록 느껴지는 의무감이 봉사의 첫 단추였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사설 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 아동의 모임을 알게 됐고 그 아이들을 위해 군산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건치) 회원 모두가 돌아가며 점심시간을 봉사의 시간으로 무료 장애 아동 치과 진료를 시작 했었습니다.이후 전주로 치과를 이전한 저는 이곳 전주에서도 특정 학교를 정해 봉사하기로 계획을 하였고 이미 자림원 봉사 활동을 하는 전주 건치에 합류 할까 하다가 일요일 진료 시간이 맞지 않아 주중에 봉사할 수 있는 곳을 찾던 중 전주시 보건소 구강보건팀이 장애 아동 진료를 구상 중임을 알게 됐고 팀장이 예전 공보의 시절 같이 근무했던 치과위생사인 기막힌 인연으로 함께 은화학교를 선정하여 봉사를 시작 했습니다.유치부에서 고등학교까지 약 300명의 학생들을 검진하고 치료하고…. 그런 시간이 벌써 15년을 넘다 보니 이젠 아이들도 학교의 선생님으로
나는 영화보기를 무척 좋아한다. 돌이켜보니 자유가 허용되기 시작한 대학시절부터 연극, 영화를 많이 찾아다녔고 결혼이후 이런저런 역할에 바빠서 취미생활의 필름이 끊겼었다. 그러다 약 5년 전 지금의 직장에 입사하여 같은 대학 연극부 후배와 동료로 일하면서 다시 취미생활에 불이 붙었다.처음엔 보고 싶은 연극을 쫓아다녔는데 시간, 공간적 제약이 많아 자연스럽게 영화를 많이 보게 되었다.진료하는 주중보다 휴일인 주말엔 더 바쁘고 치열하다.아직 수험생인 두 아이들의 스케줄과 투정을 피해 아주 치밀하게 영화와 가능시간을 찾아 예매하고 주차시간도 부담스러워 택시를 타는 경우도 많았다.이렇게 허덕이면서 취미생활을 고수하다가 최근엔 “엄마도 힐링이 필요해”라며 주말의 일정시간은 완전히 자유를 보장받았다.왜 내가 영화에 이렇게 몰두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나의 영화에 대한 ‘공감’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상황과 인물에 대한 깊은 공감과 일치감은 어느 순간 나 자신의 상처와 부끄러움과 후회 등을 끄집어내어 보듬어주고 위로해주며 그 당시엔 몰랐던 새로운 관점으로 나에게 카타르시스를 선물한다.최근에 본 영화 ‘그녀(Her)’도 공감이란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영화 ‘그녀
지인들의 얘기를 빌리자면 남자건 여자건 40대 진입을 코앞에 둔 지금이 심적으로 제일 심란하고 허무하다던데… 그러고 보니 6개월 남짓 남은 나의 30대! 난 나의 40대를 진심으로 축하하며 찬란하게(?) 받아들이고자 한다.23살부터 시작된 첫 사회생활. 병원생활과 편입, 대학원으로의 진학 등 나름 부지런한 20대를 보낸듯하다. ‘20대가 치열하지 않으면 30대는 없다’는 말을 가슴에 새기며 닥치는 대로 열심히, 무언가에 대한 끈임 없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돌이켜보면 20대에는 자로 잰 듯 정확하고 빠른 걸 좋아했었다. 여행을 간다 치면 당연히 비행기와 고속도로를 이용했고, 출발 전 미리 인터넷을 검색해서 가장 빨리 목적지로 도착할 수 있는 방법, 주변의 맛 집이나 관광명소를 이미 컴퓨터상에서 여행 후 정작 그곳에 도착하면 인터넷의 정보와 동일한지를 비교하는 수준의 여행을 했었다. 운전은 또 어떤가. 빨간색의 정지신호를 기다리는 것조차 시간낭비라고 생각하곤 옆길로 돌아서 가곤 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한식집보다는 패스트푸드나 간단히 먹을 수 있는 분식집을 자주 찾았고, 약속시간에 늦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직장생활에 있어서도 실수는 두 번 반
어떤 글에서 김수영 시인이 “독서와 생활을 혼동하지 말라. 독서는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생활은 뚫고 나가는 것”이라고 쓴 것을 보았습니다.나는 최근 독서를 통해 최정환이라는 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최정환 씨는 1958년생의 척수장애인이었습니다(과거형으로 쓰는 것은 이미 고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의 버림을 받고 보육원에서 살다가, 노력 끝에 1985년 다시 아버지를 찾았으나 또 한 번 거부를 당했고, 오히려 이 때문에 당시 생활보호대상자(지금은 기초생활보장수급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호적상의 아버지 때문에 소위 ‘부양의무자’ 기준에 걸린 것이지요. 그래서 최정환 씨는 노점을 통해 직접 생계를 꾸려가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노점상 단속에 항의하다가 다리가 골절됩니다. 기존 척수장애와 교통사고로 인한 중증장애에 골절이 더해진 것이지요. 그래도 최정환 씨는 생계를 위해서는 노점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단속은 해가 갈수록 심해졌고, 어느 날 최정환 씨는 자신의 마지막 재산을 단속으로 빼앗기게 됩니다. 이것을 찾으러 구청에 갔지만 항의는 무의미했고 돌아오는 것은 모멸감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최정환 씨는 분신을 택합니다. 1995년 3월
지금은 쓰이지 않는 말이지만 한센병은 문둥병이라고 불리며 천형으로 여겨졌다. 한센병은 약물치료로 완치가 가능한 질병이지만 얼굴이 일그러지고 손가락이 구부러지는 외양 탓에 한센인들은 차가운 사회적 시선과 차별속에서 외부와 고립된 정착촌을 형성하여 힘겨운 삶의 끈을 이어왔다. 구라봉사회는 1969년 7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뜻을 같이하는 몇 사람의 치과의사와 치대생들이 이러한 한센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 있는 국립나병원에서 치과진료 봉사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구라봉사회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매년 전국 각지의 한센인 정착촌을 찾아 다니며, 의치와 구강질환 치료를 통해 의료서비스의 사각지대에 놓인 한센인이 음식을 씹고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렇게 구라봉사회의 손길이 닿은 한센인이 2만6000여명, 만들어진 의치가 4000여개에 이르고 있다. 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에서 맞는 나의 여름방학 첫날은 구라봉사회 하기진료 준비로 시작되었다. 구라봉사회의 활동은 치과의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면서, 그 재능을 우리 사회에서 가장 열악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베푼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나는 입학과 동시에 구라봉
3년 차 때 쯤으로 기억합니다. 제 자신에게 물어봤습니다. 행복하니? 행복하지 않았습니다.제가 치과위생사가 된 이유는 목표 없이 살아온 제 인생의 결과물 이었습니다.고 3때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외동딸인 저는 엄마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치위생과가 무얼 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취업률만 보고 입학했는데요, 그렇다 보니 대학생활이 너무 낯설고 재미없어 과를 잘못 선택했다는 생각에 많이 괴로워하면서 억지로 대학생활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대로 치과위생사 면허증을 취득하고 어렵지 않게 치과에 입사를 하게 되자 내 일이 아무나 할 수 있는 가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제 자신과 제 일에 대해 자존감이 낮아졌습니다. 행복하지 않았습니다.좋은 대학에 편입하고 뭔가 다른 일을 해야 내 인생이 근사해지려나?성공하기 위해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직업이나 스펙이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에 치과에 일하면서 방황하였는데요, 더 이상 목표 없이 살며 후회하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이렇게 그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절실함으로 책에 매달렸습니다.책과 함께 제 인생에 대해 의논하며 행복해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노력 가운데 깨달음이 있었습니
요즘 우리 나라 맥주 맛에 관한 비판이 여기저기서 들립니다. 다양한 외국 맥주들을 접할 기회가 많아지다 보니 우리나라 맥주의 맛에 대한 의구심이 생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잘생긴 남자 공대 신입생이 공대 여대생과 눈이 맞았다가 여름방학동안 다른 과 여대생들을 접하고 나면 모든 과내커플이 깨지는 원리랑 비슷하다고 하면 과장일까요.맥주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가 가능합니다. 상면발효의 에일(ale)과 하면발효의 라거(lager)라는 두 갈래로 나뉘는데, 우리나라 맥주의 대부분은 라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상면발효의 에일은 19세기 하면발효방식의 라거가 탄생하기 전까지 생산되던 맥주들이며, 붉은 색을 띄는 종류가 많고 향긋함과 묵직함, 상대적으로 적은 탄산, 쓴맛과 부드러움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라거맥주의 장점은 무난하고 즐기기 쉬운 반면 개성이 적다는 것이고 에일 맥주는 그에 비해 더 다양한 즐거움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쉬운 건 정말 맛있는 한국맥주를 만나기 어렵다는 겁니다. 아직 못 찾았습니다. 시원함 느낌을 강조하는 것이 대세가 되다 보니 탄산의 양을 높이고 실제 맥주의 향이나 묵직한 바디감 같은 것들은 고려사항에서 제외된 지 오래인 것만 같
치과진료를 하며 10여 년 동안 글을 써오면서 내게 붙은 타이틀이 2개가 있다. 아동문학가와 추리작가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서로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동심에 가득 차야하는 아동문학가와 유혈이 낭자한 추리작가를 병행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내가 아슬아슬한 문학적 줄타기를 하면서 추리소설을 써야 하는 이유는 셜록 홈즈 때문이다. 셜록 홈즈의 매력에 빠진 나는 홈즈 패스티시(다른 작품의 내용이나 스타일을 원작에 충실하게 모방하여 재창조한 작품을 말하는데 원작을 유머러스하게 변형시켜 모방하는 패러디와 비교가 된다.)작품을 지난 3년 동안 6편을 발표해왔다. 이 시리즈는 재미교포 사립탐정인 윌셔 홈즈가 국과수 자문위원 치과의사인 라 원장과 파트너가 되어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시리즈이다. 윌셔 홈즈는 셜록 홈즈의 추리 기법을 원용한다. 의뢰인의 입안을 들여다보고 모든 것을 알아내는 라 원장은 윌셔 홈즈에 의해 라왓슨이란 이름이 붙여진다. 이 시리즈의 첫 단편 ‘노끈’은 KBS 라디오에서 ‘2012 여름 공포추리특선’으로 방송되었다. (지금도 KBS에서 다시 듣기로 무료청취가 가능하다. 바로 듣기 링크 - http://t.co/R1nadXWz ) 그런데 윌셔 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