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발표가 나왔다. 지난 17일 보건복지부는 드디어 ‘보건복지부와 소속기관 직제 시행규칙 일부 개정령’을 공포, 시행했다. 일반적으로 행정당국의 직제개편은 간혹 있어온 일이라 그리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이번 직제개편은 구강보건 전담부서의 폐지를 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치과계로서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의 역사로 남게 됐다. 물론 이런 조직개편이 되리라는 소식은 수개월 전 입수한터이다. 그러나 막상 이렇게 구강보건팀 폐지라는 것을 공식 발표하니 그 참담함이 더 깊어진다. 위정자들의 잘못된 생각 하나가 이렇게 국민의 건강과 직결돼 앞으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위정자를 뽑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이제부터 당국은 구강보건에 관련된 업무와 사업, 정책입안 등을 생활위생팀에서 맡는다. 생활위생팀은 문자 그대로 공공위생을 담당하는 부서다. 공중위생 관련 법 및 제도 개선과 실내 환경위생 관리, 공중위생서비스 수준 평가, 위생 처리업 관련 사항, 미용교육에 관한 사항 등이 주요 업무다. 그런 업무에 구강보건에 관한 업무를 끼워 넣은 셈이다. “공중위생 및 미용 등에 대한 관리를 구강보건과
자식 통제를 상실하면아이들은 집안의 황제로부모들을 신하로 부린다 “우리 애 좀 야단쳐 주세요.” 이것은 치과에 온 구환 어린이의 엄마들이 자기 아이의 양치질 소홀을 탓하며 치과의사가 교육을 강화해 달라는 주문의 말이다. 임상 경험이 많건 적건 치과의사들이 한 번쯤은 들어보았음직한 말이고 특히 어린이를 많이 진료하는 사람들은 매우 흔히 듣는다. 나는 이 말을 들을 때 간혹 웃으며 이렇게 대꾸한다. “어머니, 제가 왜 애기를 야단칩니까? 저는 이 아이와 평생 친구가 되어야 하는데… 악역을 맡기는 싫은대요.” 그런데 곰곰이 되씹을수록 이 말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과연 어머니의 주문대로 어린이를 야단쳐 이를 잘 닦도록 만들 것인가? 하기야 환자 교육도 의료인의 기본 사명 중의 하나가 아니던가? 그러나 여기엔 묘한 차이가 있다. 과연 이 엄마는 우리가 교육해 준대로 정말로 집에서 아이의 양치질을 고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본 것일까? 아니면 아무런 노력을 해 보지도 않고 다시 내원한 것이 미안하고 선생님께 비난받을 것이 두려워 미리 방패를 치는 것은 아닐까? 어머니가 할 일을 잘 못 하겠으니까 치과의사 선생님이 대
이번 국회에서 처리될 보건복지 관련 법안이 매우 많다. 그 가운데 국립치대독립법인화법안과 의료법 전부 개정안에 대한 처리문제는 치과계를 비롯한 전 의료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특히 의료법 개정안은 의료계가 사활을 걸고 반대하고 있어 그 처리여부에 따라 파장의 크기가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단 의료법 개정안은 다행스럽게 6월 임시국회에서는 심의조차 될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결국 9월 국회에서 다뤄질 수밖에 없게 되겠지만 의료계의 강력한 반발과 심의 일정이 짧은 점, 선거철이 다가와 의정활동에 등한시할 수 있다는 여러 정황을 볼 때 그 결과도 정부의 의지대로만 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법안이 반드시 처리돼야 할 것도 있다. 국립치대독립법인화 법안이 바로 그것이다. 여야의원들이 최근 불거진 의료계의 정치권 로비사건 문제로 치과계의 특정법안 처리에 다소 몸을 사리는 경향이 있어 보이지만 이 법안 자체가 갖는 의미, 즉 독립법인으로 해야 하는 임상학적, 교육학적 의미 등을 고려한다면 몸 사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더욱이 이번에도 만일 국회통과가 되지 않는다면 의료법 개정안과 마찬가지로 9월 국회로 넘어가게 되는데 앞서 지적한 여러
우리나라가 1980년대 까지만 해도 한자리수였던 이혼율이 1990년에 11.4%로 두자리수를 기록하더니 2005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하루 평균 352쌍이 이혼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사회의 기본적 단위인 가정공동체가 급속히 붕괴되면서 가족해체의 비극적 결말을 낳고 있습니다. 개중에는 상당한 비율이 황혼이혼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그만큼 위기의 가정이 많다는 증거입니다. 오래전 SBS TV 프로그램중 ‘세상만사’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이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무대로 초청해서 여러가지 게임을 하는 프로였는데 아주 인기가 높았습니다. 한번은 시골에 사는 70대 후반의 부부가 초대를 받고 이 무대에 나왔습니다. 이분들에게 주어진 게임은 할머니 머리 위에 넉자로 된 한자말을 띄워놓고 할아버지가 설명을 하고 할머니가 알아 맞추는 것이었는데 할머니 머리위에 뜬 글자는 ‘천생연분’이였습니다. 결혼생활 55년이 넘는 이 할아버지가 문제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내뱉은 첫 설명은 이것이었습니다.“당신과 나 사이” 할머니가 대뜸 대답할때 “웬수” 놀란 할아버지가 당황하면서 다시 말했습니다. “아니 그런게 아니라 두자
최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조만간 국회에 정부입법안으로 제출될 것으로 보이는 정부의 의료법 개정안에는 의료인의 의무로서 설명의무를 새롭게 추가해 규율돼 있다. 의료인의 설명의무는 그간 의료인단체에서 적잖은 우려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간 여러 쟁점들에 비해 많은 논의가 이뤄지지는 못했는바, 주요 쟁점으로 부각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하에서는 의료인의 설명의무의 법제화(법적 의무화)가 적정한지에 관해 살펴보도록 한다. 현재 의료인의 설명의무는 주로 의료행위 전에 의료행위의 필요성 및 위험성에 관해 환자가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수진여부를 선택할 수 있을 정도로 설명을 해야 한다는 의무를 의미한다. 이러한 설명의무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기 위해 의료인에게 보장된 의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의사가 설명을 하지 아니한 경우에도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침해되지 아니한 경우, 즉 악결과가 발생하지 아니하거나, 악결과와 의료행위가 무관한 경우에는, 설명의무가 문제된다고 할 수 없다. 이렇듯 의료인의 설명의무는 그간 법원의 판결(주로 민사상 손해배상소송)을 통해 적용범위와 의의가 어느 정도 밝혀진바 있다. 법원은 의료행위가 행해지고 악결과가 발생된 경우에 의료행위와
책의 저자 ‘조안 마그레타’는 90년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의 전략 부문 편집자를 지낸 분으로 시대적 경영의 화두, ‘변화"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변화를 지향하던 많은 기업들 중에서 일부 기업들만이 살아 남은 것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해서, 삼성그룹의 회장님도 ‘마누라와 부모를 제외하고는 다 바꾸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실제 변화를 시도했던 기업들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마그레타 교수는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우를 지적하고 있다. 기가 막힌 아이디어와 낙관주의에 치중한 나머지 비즈니스의 기본을 지키지 못한다면, 기업은 성공할 수 없다고 한다. 한 마디로 기본에 충실함을 바탕으로 변화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이다.그녀는 경영에 대해 우리들이 쉽게 이해하는 평이한 말로서 풀이하고 있다. 경영은 사람들을 모으고 그 사람들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조직과 ‘경영의 규율’을 만들어서, 일의 성과를 내도록 하는 것이라고 한다. ‘경영의 규율"이란 피터 드러커가 말했듯이 일관성 있게 전체를 하나로서 묶어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경영의 핵심 개념을 네 가지로 요약한다. 우선 가치창조를
이안희<본지 집필위원> 진료준비를 하고 있는데 간호사가 조심스레 묻는다. “원장님 어제 TV보셨어요? ” “아니…왜?” “어제 소비자고발 프로에 임플랜트에 대해 나왔어요.” “왜?”“원가는 얼마 되지 않는데 치과마다 가격차이가 많이 나고, 임플랜트도 다량 구입하면 몇 개 덤으로 더 주고, 그럴 경우 픽스처 가격이 턱없이 싼데도 환자한테 받는 것은 몇 십 배라고요.” “치과시술이 어디 들어가는 재료의 원가로만 따질 수 있는 건가? 원가에 비할 수 없는 술자의 시술료를 어떻게 가격으로 따지나?"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하고 돌아섰지만, 반복되는 보도에 식상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마음은 언제나처럼 착찹해졌다. 진료를 하면서도 내가 지금 진료하고 있는 환자분이 자신이 받는 진료의 구체적인 내용의 원가를 궁금해 하고 자신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가라는 의구심을 가질지도 모른다는 불편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개업초기 보철치료를 받으신 어르신이 조용히 오셔서 ‘아는 기공사가 있는데, 금값 기공료값을 다 안다"고 은근히 협박하시며 나를 심히 불쾌하고 어이없게 만들던 일도 떠올랐다. 물건을 떼어서 얼마를 붙이고 파는 슈퍼도 아닐진대, 왜 유독 치과
<1558호에 이어 계속> 예를 들어, 어떤 아프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에서는 치아의 줄질(filing)과 절단(mutilation)이 관찰된다. 가죽을 계속 씹는 에스키모인과 인디안의 치아상의 광범위한 교모, 일본 여성에서 발견되는 채색된 치아, 구강점막에의 문신 등이 감별에 유용한 특징적인 문화적 전통의 고유한 형태이다. 죽은 시체의 육안적 개인식별에 대해 보면 전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가족이나 그 밖의 지인들에 의해 죽은 사람의 신원확인이 형식적이거나 법적으로 행해 지고 있다. 이것은 각각의 사회가 가지고 있는 법률적인 체계나 제도에 맞춰져서 발전돼 왔다. 조사하는 과정이 어떻든 간에 대부분은 사람의 사망으로 시작된다. 대부분의 사람이 사망한 경우에는 죽음과 관련된 주변의 환경과 더불어 신원의 확인이 된다. 이런 경우 법적인 확인도 어떤 특별한 의학적 과정을 거치는 것보다 단순히 법적권한을 가진 사람에 의해 이뤄지게 된다. 이 경우에 병리학자는 사망의 시간, 원인 그리고 주변 환경에 대해 조사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사건을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과 죽음 모두에서 인간적인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사망한 사람을 다루는 방법에는
보건복지부가 27일 개최하는 구강보건포럼에 전 치과계 단체가 (21일 현재) 불참키로 했다. 아마도 구강보건전담부서를 없앤 후 치과계를 비롯 시민단체까지 가세한 비난이 이어지자 비록 생활위생팀에서 구강보건 관련 정책업무를 맡고 있지만 이렇게 신경 쓰고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포럼으로 치과계와 시민단체들의 관심을 호전시키기에는 매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포럼에서는 2006년도 국민구강보건 실태조사 결과보고 등을 다룬다고 한다. 물론 다뤄야 할 과제다. 그러나 그보다 당국이 그 어느 때보다 다시 한번 심도 있게 다뤄야 할 과제는 구강보건전담부서의 필요성이다. 그에 대한 포럼을 열어야 할 것이다. 지금 당장 복지부가 다시 구강보건 전담부서를 부활시키면 기준 없이 흔들리는 부서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부담을 이해는 한다. 한번 뽑은 칼 도로 집어넣는다는 것이 영 체면이 말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칼을 누가 뽑았냐는 것에 초점을 둔다면 체면이나 부담에 그리 연연할 필요가 없다.정부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진다면 답은 나와 있다. 문제는 정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고는 늘 말해 오지만 실제
좋은 치과진료를 받도록아이들 눈높이에서항상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보내려고 내 자신에게 주문을 건다. 올해 9년차로, 일 할 때는 언제나 에너지 넘치도록 활기차고, 즐겁고, 신나게 일을 즐긴다.많은 사람들이 질문하기를 소아치과에서 일을 하면 우는 아이들 다루기 힘들어서 어떻게 하냐고 묻지만, 치료할 때 막 울다가도 끝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놀이방에서 웃고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아이들의 맑고, 순수함에 즐거워진다. 아이들과 함께 있다보면 내 생각도 젊어지는 것 같고, 내 깊은 곳에 숨어있는 순수함을 찾아보기도 하고, 아이들의 웃음과 울음을 통해 보람과 긍지도 느낀다. 성인들은 치료를 받다가 우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아이들은 문을 들어서기도 전에 심하게 우는 경우도 있고, 치료도중 살려 달라고 우는 아이도 있다.사실 치과하면 남녀노소할 것 없이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다. 막상 치료해야 한다고 체어에 누워야 한다면 엄살도 심하고, 겁이 많은 나도 떨린다. 그래서 남은 사랑니 2개를 아직 못 뽑고 있다. 어렸을 때 치과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서른이 넘도록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 같다. 초등학교 입학 전의 기
한국사람들은 보통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주로 “진지를 잡수셨어요?” 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이는 보릿고개를 넘기느라 겪는 배고픔과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인사말이었던 듯 합니다. 어쩌면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도 안녕 할 수 없었던 우리민족의 과거사를 반영하는 인사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우리처럼 그 시대 형편을 반영하는 인사말을 가진 민족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똑 같이 “샬롬”(당신에게 평안이 있기를)이라는 인사를 주고 받습니다.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을 받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평화는 민족의 한이자 열망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지명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칼 하게도 예루살렘 만큼 전쟁의 참화를 여러번 경험한 도시도 드뭅니다. 예수살렘은 지금까지 20번 이상 무력에 의해 주인이 바뀌는 운명을 겪었고, 과거에는 거의 10번이나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는 아픔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평안’이라는 뜻도 ‘평화의 도시’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중세의 어느 수도원에 낯선 사람 하나가 기웃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