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도 않는 검은 그림자가 지구 상공을 누볐다 불행히도 불안은 비껴가지 않았다 검은 그림자는 수액처럼 지상에 스며들었다 뉴스를 보다 잠이 들었는데 끝이 안 보이는 배급 줄 맨 끝에 내가 떨며 서 있었다 격리와 고립이라는 초유의 현실 죄 없는 사람들까지 마녀사냥당하듯 죄인이 되고 서로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추궁했다 총성도 없이 선전포고가 이어졌다 마스크 두 장을 다 쓰고 창문 닫고 머리까지 이불을 덮어 올렸다 그날 밤에도 나는 낡은 잠옷 바람으로 보이지도 않는 배급 줄의 꼬리를 찾으며 울고 있었다 역설적으로 다시 푸르러 맑아진 지구를 검은 그림자가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이영혜 원장 -2008 《불교문예》 등단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창과 졸업 -서울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초빙 부교수 -박앤이서울치과의원 원장 -시집 《식물성 남자를 찾습니다》
걸림돌이라고 발로 걷어차지 말라 돌아오는 것은 아프고 쓰린 상처뿐 언제 우리도 다른 사람의 걸림돌 된 적 있으리라 걷어찬 것만큼 우리도 걷어 채이고 아파서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차가운 광대 거무튀튀한 어둠의 밤 돌 위에 내리는 별빛 평평한 디딤돌인 줄 알고 밟았는데 뾰족한 걸림돌에 걸려서 크게 한방 넘어져 발이 부러진다 세월의 씻김과 바람의 빗김 걸림돌 닳고 닳아 누군가의 디딤돌 될 때 우리의 무대는 막을 내릴 때가 된다 깎이고 마멸되는 마음 끝없이 쏟아지는 빗물 내 마음의 강물 디딤돌은 어디인가 김계종 전 치협 부의장 -월간 《문학바탕》 시 등단 -계간 《에세이포레》 수필 등단 -군포문인협회 회원 -치의학박사 -서울지부 대의원총회 의장 -치협 대의원총회 부의장 -대한구강보건학회 회장, 연세치대 외래교수 -저서 시집 《혼자먹는 식탁》
유난히 더 노란 봄이 왔다 산수유꽃들까지도 바이러스 왕관*을 쓰고 있었다 꽃구경 다녀간 사람들이 왕관에 감염되었다며 모든 꽃놀이를 금지한다고 했다 만개한 유채꽃밭을 트랙터가 갈아엎었다 천지는 더 노랗게 뜨거나 하얗게 질렸다 부고도 없이 바람에 떨어져 사라지는 혼들이 매일같이 봄밤을 흔들었다 비말처럼 기침처럼 혹은 각혈처럼 꽃잎들은 숨죽여 죄인처럼 피고 졌다 세기적 봄날들이 역사책에 붉은 꽃잎으로 각인되며 고개를 떨어트린 채 흘러갔다 * 코로나(Corona) : 라틴어로 crown(왕관) 혹은 halo(후광, 광배)를 의미한다. 이영혜 원장 -2008 《불교문예》 등단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창과 졸업 -서울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초빙 부교수 -박앤이서울치과의원 원장 -시집 《식물성 남자를 찾습니다》
여행객들 오고가는 김포공항청사 번쩍번쩍 유니폼 입은 기장 초라한 내게 거수경례를 한다 순간 당황한 나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다 군의관님 안녕하십니까 육군항공대 박 중위입니다 그때 치료해 준 치아 지금껏 잘 쓰고 있습니다 하하 크게 웃는 기장의 입속 훈장처럼 금니가 번쩍인다 김계종 전 치협 부의장 -월간 《문학바탕》 시 등단 -계간 《에세이포레》 수필 등단 -군포문인협회 회원 -치의학박사 -서울지부 대의원총회 의장 -치협 대의원총회 부의장 -대한구강보건학회 회장, 연세치대 외래교수 -저서 시집 《혼자먹는 식탁》
명성 호텔 라운지 레스토랑에서 민혁은 순영의 부모님과 저녁 식사가 약속 돼 있었다. 라운지 안에는 제이슨 므라즈의 이란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뵈는 창가 자리였다. 마천루들 사이로 정체된 차들의 불빛이 크리스마스트리 알전구들처럼 보였다. 순영은 이번이 아버지를 설득시킬 마지막 기회라고 말했다. “오빠, 오늘은 아빠 마음에 꼭 들게 말해야 해.” 순영이 몇 번이고 신신당부했다. 호텔의 입구 쪽에서 순영의 부모님 두 분이 걸어 들어왔다. 민혁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넙죽 인사를 했다. “두 분 오시느라고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특별히 야경이 멋진 창가 자리로 예약해두었습니다.” 순영이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민혁은 라운지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친구와 통화 중이었다. 순영은 민혁을 놀라게 해주려고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다가갔다. “잘 지내지? 결혼? 응 조만간 할 거 같은데. 장인 되실 분이 보건소 그만두고 제주도에 내려와서 개원하라고 성화셔서 말이야. 데릴사위? 말도 안 되지. 우리 어머니는 어쩌고. 보건소를 그만두긴, 지금 개원환경이 얼마나 안 좋은지 뻔히 아는데. 제주도에 내려가서 개원하는 척하면서 일단 결혼하면, 순영이든
위아래 턱 다해 하나 밖에 안 남은 송곳니 보기에는 멀쩡한데 살아온 세월만큼 잇몸 허물어져 힘없이 흔들거린다 그냥 내버려 두어도 밥 먹다 빠져버리겠다 텃밭에 무 뽑기보다 훨씬 가볍게 뽑혔다 할머니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 흐른다 “아프셨어요, 그렇게?” 할머니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 세상에 부모님께 받은 치아들 다 잃고 마지막 남은 아들 같은 송곳니마저 뽑혔으니 불효도 불효지만 누굴 의지하고 살거나 병아리 눈물만큼 핏기 묻은 송곳니 싸달라고 애원한다 측은지심(惻隱之心) 없는 치과의사 천국 가긴 영 글렀다. 김계종 전 치협 부의장 -월간 《문학바탕》 시 등단 -계간 《에세이포레》 수필 등단 -군포문인협회 회원 -치의학박사 -서울지부 대의원총회 의장 -치협 대의원총회 부의장 -대한구강보건학회 회장, 연세치대 외래교수 -저서 시집 《혼자먹는 식탁》
민혁이 술값을 계산하고 나오자, 박 교수는 그새 담배 한 대를 더 태우고 있었다. “프로토타입을 끼던 환자는 젊어서부터 술, 담배를 입에 달고 살았다더군. 늘그막에 구강암에 걸려서 혀 절제술을 받았는데, 피부판 이식술과 3D 프린팅으로 인공 혀를 재건할 수 있다고 했더니 자기는 울퉁불퉁한 혀는 싫다더군. 그래서 프로토타입이 탄생한 거지. ”박 교수는 발그레해진 얼굴로 민혁을 데리고 자신의 연구실로 갔다. 1층은 학부생 실습이 진행 중인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2층으로 통하는 계단으로 올라갈 때쯤 순찰을 하던 나이든 경비원이 박 교수를 알아보고는 다가와 먼저 인사를 했다. 복도 끝에 연구실을 향해 걸어가자 자동으로 복도 천정에 등이 켜지면서 어둠이 물러갔다. 박 교수는 민혁과 함께 연구실에 들어서자마자 상아색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신문에는 ‘씹고, 말하고, 소통하고’란 제목의 칼럼이 펼쳐져 있었다. “어때, 사진 그만하면 봐줄 만한가?” “네, 잘 나왔네요.” “하하 그런가? 내가 머리숱이 좀 없어 그렇지. 사진발은 괜찮지.” 연구실 우측 벽면의 책꽂이 옆 철제 캐비닛 쪽으로 다가간 박 교수는 맨 위 칸 서랍을 열고 은색 철제 가방을
하늘이 주신 재능을 불꽃처럼 방전하고 2, 30대에 생을 마감한 모차르트 푸슈킨, 가깝게는 이상... 천재는 요절한다. 그러나 역도 진리는 아니어서 장수한다고 둔재는 아니다. 뉴턴 괴테 위고... 물론 의학지식과 농업생산성이 턱없이 낮던 옛날에 나온 얘기다. 다행히(?) 30대를 넘겨 나이 든 천재는 괴롭다. 내 눈에도 경이로운 나 자신의 업적을 어떻게 넘어설까? 치받고 올라오는 후배도 조바심을 부추긴다. 쫓기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렇지만 생각을 바꿔보자. 잔챙이 중에서 준척(準尺)은 폼이야 나겠지만, 월척과 어울려야 오래 살고 씨알이 굵어야 낚시꾼도 몰린다. 영화계 황금기는 문희ㆍ남정임ㆍ윤정희의 1세대와 장미희ㆍ정윤희ㆍ유지인의 2세대 트로이카 시대였고, 소설도 조정래ㆍ황석영ㆍ최인호의 선 굵은 서사(敍事) 삼총사 시절에 인기를 끌고 책도 많이 팔렸다. 흔히 일인천하 독주를 꿈꾸지만, 열띤 경쟁은 판을 키우고 격을 높이니, 작가에게는 생필품이요 고마운 존재다. 치열한 경쟁의 스트레스를 벗어나는 방법. 첫째는, 초반 점수 차를 확실히 벌려 놓는 프로골퍼 방식이다. 마지막 라운드에 여유 있게 우승을 하지만, 모든 자료가 열려 있고 만인이 똑똑한 오늘날,
혀를 되찾은 민혁은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보건소로 출근했다. 최 과장은 괜히 소장님 심기만 건드렸다고 짜증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화장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졌다. 그는 휘파람을 한 번 불어보았다. 혀 보형물이 입안에서 스스로 자리를 잡으며 부르르 떨었다. 민혁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구강보건실로 들어갔다. “얼른 울음 뚝 못 그쳐. ”치과 진료용 의자에 앉은 아이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위생사가 아이를 달랬다. “약을 두 번 바르고 빛을 쪼여주면 끝. 어때 쉽지.” 아이는 엄마와 민혁을 번갈아 불안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아이는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린 채 버텼다. 그러자 엄마가 아이를 낚아채고는 밖으로 끌고 나갔다. 아이를 꾸짖는 소리가 복도를 사납게 울렸다. 이윽고 아이가 다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 민혁은 속이 메스꺼워졌다. 혀가 저절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혀 보형물이 부풀며 딱딱하게 경직됐다. “그렇게 윽박지르면 아이가 조용해지나! 당신은 부모로서 자격이 없어.” 민혁은 속사포처럼 말을 뱉고는 이내 놀라 입을 다물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목구멍에서 맴돌던
초딩 때 윤백남의 소설 <흑두건>을 읽었다. 배경이 인조반정 전후였던가? 천하장사들이 만나 힘을 겨루는데, 갑이 손가락으로 굵은 호두알을 아작 깨뜨리자 을은 두툼한 엽전을 종이처럼 접는다. 부엌에서 따닥 소리가 나서 가보니 한 총각이 아궁이 앞에 앉아 팔뚝만 한 참나무를 가볍게 분질러가며 불을 땐다. 과장인 줄 알면서도 지붕 위를 훨훨 날아다니는 영웅호걸들의 활극에 가슴이 뛰었다. 일제의 강압 하에서 개화기를 맞은 선배들은 역사극처럼 제한된 소재로 흥미 위주의 글을 많이 썼고, 이런 풍조는 극한적인 대립과 전쟁으로 멍들었던 해방 후로 이어졌다. 어려운 시절일수록 사람들은 영웅호걸에 열광한다. 주인공은 영어로 히어로ㆍ히로인 아닌가? 어쨌든 이광수의 <단종애사> 김동인의 <젊은 그들> 박종화의 <금산의피>는 우리의 역사관에도 큰 영향을 주었고, 소재가 무궁무진한 세계적인 문화재 《이조실록》 덕분에, 사극은 여전히 소설ㆍ드라마의 노다지판이다. 사극 DNA는 7-80년대 3대 구라 황석영, 조정래, 최인호로 꽃을 피우는데, 출세작 <장길산>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했던 탓인지, 황 작가는 스스로를 얘기꾼(Story
민혁은 M치과대학병원 구강악안면외과 주임교수인 박병삼 교수의 연구실로 향했다. 박 교수는 그가 졸업한 치과대학의 은사였다. 연구실은 복도 오른쪽 맨 끝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박 교수는 보이지 않았다. 우측 벽면에 책장 세 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고 그 옆으로 철제서랍장이 있었다. 좌측 벽면에는 클래식 기타 동아리 지도교수답게 보면대와 기타가 벽에 기댄 채 놓여 있었다. 학생들의 과제물이 수북이 쌓여 있는 박 교수의 책상 위에는 여러 권의 책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민혁은 《언어중추에 관한 연구보고서》란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의 중간지점에 ‘뇌의 언어중추 영역 브로카 베르니케’라고 적힌 인덱스 부분을 펼쳤다. 책 하단에 다음과 메모가 적혀 있었다. 뇌에서 말을 만들어내는 브로카영역 뇌파를 활성화시키는 혀 보형물 프로토타입(원형, 原型), 말을 이해하는 베르니케 영역 뇌파를 활성화시키는 B타입, 두 영역 모두 활성화시킬 수 있는 C타입. 잠시 후 박 교수가 연구실로 들어오자 민혁은 서둘러 손에서 책을 내려놨다. 민혁은 허리를 굽혀 공손하게 인사했다.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이 정수리를 겨우 가리고 있었고 그는 습관처럼 머리를 왼쪽으로 쓸어 올렸다.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