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토)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기사검색

피아니스트, 덴티스트

Relay Essay 제2485번째

짝짝짝!!!!
희미하게 박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계속 맴돌던 귓속의 멍함이 사라짐과 동시에 박수 소리는 갑자기 커졌다.

 

아!~ 끝났구나, 드디어 끝났어.
울컥함이 올라오는 찰나, 다리에는 힘이 다 빠져나간 듯 풀썩 주저앉고 싶었다. 어떻게 인사를 했는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기억나지도 않은 채 무대 뒤로 걸어갔다. 대기실 안 모든 학우가 기립 박수를 치고 있었다. 너무 멋진 연주였다고 말하는 그들의 거짓말 같은 찬사를 들으면서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지난 4년간의 노력과 땀이 그 7분 동안 증발되었다.

 

딸아이가 고3이 되던 해였다. 입시를 앞둔 학부모로서 미루고 미루던 대학 입학에 관한 정보를 알아보려 컴퓨터 앞에 앉았다. 갑자기 어디를 클릭했던지 화면이 바뀌더니 대형 그랜드 피아노와 활짝 웃는 노교수가 눈에 들어왔다. 잘못 들어왔구나 싶어 나가려던 순간, 아이들이 대학에 가고 나면 무료한 시간을 골프와 피아노로 보내야지 하면서 어렴풋이 했던 결심이 떠올랐다.

 

서울 사이버대학 문화예술대학 피아노과. 해외유학파 교수들의 가르침을 온라인으로 받을 수 있는 곳이다. 그래, 심심풀이로 해보자. 설마 진짜 음대 같진 않겠지? 오는 사람들도 뭐 그리 대단하게 잘 치겠어?

 

이런 생각은 얼마 가지 않았다. 교수님들은 열과 성을 다해 레슨해 주셨고, 실력이 모자라는 학우들은 열정만큼은 최고였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피아노까지 연습하는 악바리들이었다.

 

첫 한 달간 온라인 레슨 후 단체 레슨을 받는 ‘집체 레슨’이 있었다. 학교 안을 들어섰는데 오, 마이 갓! 상상 이상이었다.


완전 방음 처리된 레슨실과 연습실에는 Steinway와 Yamaha 그랜드 피아노가 두 대씩 있었다. 학교 정원에는 차이콥스키의 동상이, 층간에는 박물관에나 있을법한 옛날 피아노들이 전시돼 있었다. 심지어 연주 홀까지 있는 완벽한 <음악 대학>이었다!

 

학생들은 가정주부부터 현직 피아노 학원 원장, 음대 졸업생, 가정의학과 의사까지 다양했다. 줄리어드 음악원과 쌍벽을 이루는 커티스 음악원의 종신교수가 되신 석좌교수님 이하 모든 교수님은 정성과 열의로 가르쳐 주셨다. 얼마나 답답하였을까. 확대 복사된 악보를 돋보기 안경으로 보면서 더듬더듬 피아노를 치는 ‘마음만은 조성진’인 만학의 학우들에게 음악이라는 마법을 불어 넣어 주셨다.

 

두 번째 학기 집체 레슨 땐 매우 감동적인 일이 있었다. 평소 집체 레슨에 오지 않던 학우가 참석한 것. 그녀는 중증 장애우였고, 짧은 다리에 손가락 두 개 이상을 구부리지 못했다. 그녀는 휠체어에서 피아노 의자로 힘겹게 옮겨 앉고는 두 손가락으로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단 한 음도 틀리지 않고 쳤다.

 

아! 얼마나 연습을 했을까! 연주 후 교수님께서 힘들었던 게 있었는지 묻자 “페달을 밟는 것이 어려웠다”고 답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페달에 닿지 않는 짧은 다리였기 때문이다.

 

꼬박 4년을 여대생으로 살았다. 지천명에 이 무슨 짓인가 싶다가도 버킷 리스트에 오를 일들을 미리 하는 것이라 즐거웠다. 새벽 다섯 시 반에 기상해 도시락을 싸서 병원으로 향했고, 반찬도 없는 점심을 후다닥 먹곤 병원 앞 새로 생긴 연습실로 직행했다. 점심시간 나 혼자만의 음악 세계에 빠져 있다 보면 어느덧 오후 진료 시간이 다가왔고, 단 5분이라도 있으면 방음장치를 켜고 연습했다. 매일 3시간 이상 연습한 것 같다. 힘들지만 전혀 힘들지 않다.

 

그렇게 졸업 연주회가 다가오던 어느 날, 뜻밖의 문제가 발생했다. 무리한 일로 손과 손가락 근육이 말을 안 듣기 시작한 것이다. 손은 퉁퉁 붓고 구부리면 통증이 생겼다. 연주회 전날엔 계속된 통증으로 임플란트 수술도 뒤로 미뤘다.

 

연주회가 끝나는 순간, 지난 나날들과 힘들었던 순간이 떠오르며 울컥했다. 마지막 기회였던 그날, 나는 최고의 연주를 해낸 것이다! 무대가 끝나고 올라오신 교수님은 촉촉한 눈으로 잘했다며 포옹해 주셨다.

 

음대생으로 산 지난 4년, 고3이던 딸아이도 이제 대학 4학년이 된다. 아들도 대학 2학년이 된다. 남편이 우리 집엔 대학생이 3명 있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는데 이제 나는 그 타이틀을 반납해야 한다. 교수님의 추천으로 ‘대학’이라는 전국구 잡지에 인터뷰도 실렸다. 학부모 나이에 대학생 신분으로 기사가 난다니 얼마나 영광인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치과의사의 삶으로 돌아왔다. 멋진 꿈을 꾸고 즐거운 마음으로 잠에서 깨어나듯 그렇게 현실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