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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의 윤슬

임철중 칼럼

오쨔노미즈역(御茶노水驛) 철길 위에 걸린 다리를 건너면 도쿄이카시카(東京醫科齒科) 대학이다. 속세와 도량(道場)을 갈라놓은 협곡(峽谷)을 지나는 느낌이랄까?

 

교정과 서정훈 교수님을 모시고 미우라(三浦) 선생을 뵈러 가는 다리 위에서(1987), 두 장면이 그림처럼 떠올랐다. 첫째는 이화여대 교문 앞. 좁다란 샛길을 내려가면 다리 밑 납작한 판잣집에서 갓 출시가 시작된 라면을 팔았다(1965). 고춧가루 풀고 단무지 서너 쪽을 곁들이면, 짜장면 반값에 무한행복이었다. 하숙집 그린 필드에서 풀만 먹던 뱃속에 뜨거운 닭 국물(소문은 고래 고기 육수라고 했다)이 주르르 흘러들면, 그건 바로 감동이었다. 밤 10시쯤에 슬리퍼 차림으로 내려가서 라면 한 냄비 뚝딱하고 돌아와, 연탄불 따끈한 하숙방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우면, 이내 꿈나라로 빨려 들어갔다.

 

둘째는 서울역 북쪽 철길 위에 걸린 염춘교(鹽川橋) 다리. 소공동 본과 4년간을 만리재 중턱 외숙 댁에서 걸어 다녔다. 걸어서 30분 거리인데, 전매청 담장 밑으로 도랑을 건너는 샛길로는 조금만 서두르면 20분으로 족했다. 염춘교를 지나 이제는 수제화(手製靴) 거리가 된 중림동에 들어서면, 일제의 유물로 보이는 포도석(鋪道石) 길이 남아있었다. 화강암을 장방형 블록으로 깎아 촘촘히 박은 포장방법은 공사는 힘들어도, 무한에 가까운 수명에 비가 와도 마차 바퀴가 진흙탕에 빠질 걱정이 없어, 유럽의 도시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그러나 자동차 시대를 맞아 포도석 도로는 승차감 킬러요 고속주행의 장애물로서 아스팔트에 밀려나고, 유서 깊은 유럽의 구도심이나 중남미 군데군데에 식민지시대의 유산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사극에서 만나는 포도석은 여전히 낭만의 백미로서, 비라도 내리면 희미한 가로등 물그림자가, 해질녘 강물위에 물비늘처럼 부서지는 햇살, 윤슬같이 빛난다. 한밤에 중림동 하교길을 동무 해주던 ‘도심의 윤슬’이 지금도 꿈결인 양 떠오른다.

 

로마 공화정의 군용도로로 공사가 시작된 아피아가도(Via Appia 街道 312 B.C.)는 제국의 뼈대요 동맥이었다. 땅을 파고 큰돌 중간돌 조약돌을 차례로 다진 뒤 70cm 크기의 포도석을 덮었으며, 배수가 쉽도록 중앙을 높이고 양쪽에 인도를 마련하여, 2천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위용을 자랑한다. 단 1m 깊이의 공사도 당국이 관리하는 역사와 유물의 보고 로마와, 단 한 점도 시 밖으로 반출(搬出)하지 않는 조건하에 엄청난 부동산과 예술품을 모두 기증하여 오늘의 피렌체를 만든 메디치가의 마지막 후손 안나 마리아(1737)를 보라! 걸핏하면 과거 부정에 적폐 청산이라며 부수고 갈아엎는 대한민국에, 어떻게 문화와 전통의 싹이 자라나고 이어지겠는가?

 

그러나 누가 무어라 해도 피렌체의 진짜 보물은 단테(Alighieri Dante 1265~1321)와 그의 서사시 ‘신곡(Comedia; 후에 보카치오가 Divina를 덧붙임)’이다. 그리스도적 시각에서 인간 영혼의 정화와 구원에 이르는 고뇌와 여정을 그렸다. 내세(來世) 3개 영혼세계를 두루 다녀온 여행형식을 빌어, 모든 형태는 순간적이며 헛된 것으로 그림자 없는 영혼이라든가 천국의 강렬한 빛, 그리고 주가 창조하신 것은 원소(元素)라고 부를 그런 생명이며, 로마 교황도 주 앞에서 모두 같은 인간이라고 노래한다.

 

신앙의 뮤즈 베아트리체와 인간의 이상과 철학을 상징하는 베르길리우스를 안내자로 하여, 하느님의 은총으로 죄업을 정화하고 구원받는다는, 시공을 초월한 세계관-종교관을 완성한다. 르네상스적 뮤즈와 직관으로 현세와 내세를 잇는 길을 읽어낸 시성(詩聖)의 대작에서, 협곡 위에 걸린 궁극의 다리를 본다.

 

신곡을 읽은 교황이 감동하고 단테를 추방한 피렌체 시민도 뒤늦게 그의 귀국을 열망하지만, 자신의 주장을 거두라는 조건을 거절한 단테는 라벤나에서 생을 마감한다. 라벤나가 유해송환 요구마저 거절하자, 피렌체는 간청 끝에 무덤의 촛불 값을 내는 데에 만족하였다. 그날따라(2019. 5. 12) 라벤나에 추적추적 보슬비가 내렸다.

 

촉촉하게 젖은 알리기에리로(路)에는 모자이크 예술의 수장고(收藏庫)인 라벤나답게, 아취형으로 이어진 포도석 무늬가 물결처럼 굽실거렸다. 오래 기다렸던 단테의 묘 방문에 더할 나위 없이 절묘한‘도심의 윤슬’이었다. 신곡을 낳은 단테의 망명이, 레미제라블의 위고와 같은 19년이요, 목민심서 다산의 강진 유배는 공교롭게도 딱 한 해 모자란 18년이다. 명작은 간난과 질곡(艱難 桎梏)을 먹고 나서야 탄생하는가?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