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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치의학의 발자취를 찾아서

수필

질병을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여겼던 고대 사회의 ‘함무라비 법전’이나 ‘피 피루스 에베르스(Papyrus Ebers)’에 치과 치료와 관련 있는 내용들이 나온다.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에서 효과적인 발치용 도구(발치겸자)가 출토된 적도 있다.

 

BC6000년경의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치아 모양으로 깎은 상아나 동물의 뼈 등을 사용하여 치아가 상실된 결손부에 심으려고 갖은 노력들을 다한 흔적들이 보인다. 기원 후 600년경에 매장되었던 마야인의 유골에서는 치아 모양으로 다듬어진 조개껍질이 아래턱에 심어진 채로 발굴되기도 했다.

 

고대인들은 또한 금속으로 띠를 만들어 중간에 빠진 치아를 다듬어서 묶어주고 이를 옆의 치아와 연결해주는 방법으로 상실된 치아를 수복하고자 했고, 중세기에는 뽑아버린 귀족의 치아를 원상회복시켜주기 위한 방법으로 많은 농노들이 자신의 건강한 치아를 뽑아서 팔았다. 그 치아를 비싼 값에 산 거리의 이발사들은 귀족의 망가진 치아를 뽑고 뽑은 자리에다 가난한 자의 건강한 치아를 심어 주었다. 그러나 세균에 의한 감염, 면역학적 거부 반응, 조잡한 재료, 일관되지 못한 작업성 등으로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무모한 시도가 대부분이었다.

 

기원전 280년경에 그리스의 의성 히포크라테스는 치과의술을 포함한 의술을 합리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현재와 마찬가지로 외과와 내과는 밀접한 관계였다. 하지만 르네상스를 지나 18세기가 되기까지 서유럽에서 의학, 즉 내과 파트는 교회의 사제가 맡는 고상한 전문직(profession)이었고, 외과는 이발사(일명 이발 외과의)의 사업영역이었으며 주로 곪은 상처인 농양에 대한 배농, 사혈, 발치 등의 시술을 했다. 독일에서는 이발 외과의들이 목욕탕을 운영하기도 하였으며, 부가적으로 관장을 해 주거나 치아를 뽑아주기도 했다.

 

이후 르네상스 시대에 발달하기 시작한 해부학과 생리학 등에 힘입어 그동안 교회로부터 천대받던 이발 외과의, 즉 외과 의사가 점차 내과적 질병에 대해 설명할 수 있게 되자 본래 뿌리가 다르던 외과와 내과가 점차 통합의 방향으로 발전해 간 반면 치과는 그대로 남아 독립의 길을 가게 된다. 즉 중세까지는 의과와 치과가 구분돼 있었던 것이 아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과와 외과가 융합되고 외과 분야에서 다시 치과가 구분되는 과정을 거쳤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외과 의사들이 주로 발치를 시술하는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프랑스에서 ‘근대 치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피에르 포샤르가 출현한다. 그는 본래 프랑스 대혁명 이전에 태어난 가난한 외과 의사였다. 그가 의사로서 처음 활동하던 18세기 초반에 아픈 치아를 치료하는 대표적인 방법으로서 무조건적인 발치 이외에는 다른 도리가 별로 없었다. 아픈 치아만 제거하면 통증의 원인이 사라진다는 매우 간단한 이론에 의존하는 시술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18세기경에는 치과 의사라는 직업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터라 발치를 주로 시행하던 외과 의사 외에 전문적으로 구강 영역을 담당하는 의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피에르 포샤르는 자신이 외과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구강영역에만 집중하는 구강외과 의사, 즉 치과 의사 역할을 최초로 자원했던 인물이다.

 

그는 치아를 뽑아버리는 대신 손상이 일어난 원인 부위를 찾아 수복치료를 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오늘날의 틀니 외형을 디자인했으며 보철물들이 구강 내에서 적합하게 유지되도록 스스로 고안하고 제작했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소재인 도자기, 즉 포세린을 이용한 의치 제작에서 온갖 구강외과 수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술식과 기구를 만들어서 임상에 적극 활용하였다. 동시에 자신의 경험을 끊임없이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피에르 포사르는 외과학을 기반으로 치아와 구강 영역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최초의 의사로서 외과 의사라는 개념과는 전혀 다른 ‘Le Chirurgien Dentiste’, 즉 치과 의사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등장시킨 인물이다.

 

그는 오로지 치과 의사로서 40여 년간 활동하며 쓴 책 《Le Chirurgien Dentiste》에서 구강 질환을 분류하고 치료법 및 임상 케이스를 비롯해 치료에 유용한 기구와 이의 사용법, 치료술식 등을 상세히 기술했다. 즉 빼낸 치아를 자유자재로 다시 심고 공간을 확보한 후 치아를 밀고 당겨서 가지런히 정렬하는가 하면 오염된 치아 내부를 제거하고 충전하는 보존적 치료까지 광범위하게 다루었던 것이다.

 

《Le Chirurgien Dentiste》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현재의 치료 방법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당시로서는 선구적이고 과학적이며 체계적인 저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후대 치과 의사들은 그를 기리기 위해 ‘피에르 포샤르’ 학파를 창설했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치과 의사들로부터 ‘치과 의사의 아버지’로 칭송받고 있다.

 

이후 발전을 거듭하던 치과의학은 1951년에 스웨덴에서 또 하나의 커다란 변곡점을 맞이하게 된다. 즉 스웨덴의 정형외과 의사 브로네마크 박사는 정형외과 수술 과정에서 골절된 뼈의 고정을 위해 티타늄 재질의 나사못을 사용한 후 부러진 뼈의 유합이 일어난 다음 이것을 다시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뼈와 티타늄 못 사이에 기대하지 않았던 유착이 일어나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이러한 유착 현상을 상실된 치아의 복구에 응용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턱뼈에 티타늄 나사못을 박는 일련의 임상 실험에 성공하게 된다. 브로네마크 박사는 이 술식의 장기적 성공률에 대하여 추적ㆍ조사한 다음 1965년 이후 스웨덴을 중심으로 대중적 시술을 시행하면서 치과 임플란트(Dental Implant)라고 이름 붙였다. 

 

1965년부터 1982년까지 17년 동안 20세부터 77세까지 평균연령 53세의 남녀 600명을 대상으로 4,100개의 임플란트를 시술한 결과 5~10년간의 성공률은 상악에서 81%, 하악에서는 91%로 나타났으며 임플란트 위에 고정시킨 의치가 계속 안정된 기능을 발휘하는 비율은 상악에서는 90% 이상이었고 하악에서는 놀랍게도 100%의 성공률을 나타냈다.

 

그리고 브로네마크 박사와 알브렉슨의 공동연구로 뼈 안에 매식된 임플란트의 티타늄 표면에서 일어나는 골유착 기전에 대한 생역학적 이론이 확립되었다. 이후 1983년에 아델(Adell) 등에 의해 브로네마크 임플란트를 식립한 후 15년간의 장기적인 기능 유지 성적이 객관적인 추적 자료를 통해 보고됨으로써 장기적인 성공률까지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높은 성공률과 이론으로 정립된 생역학적 타당성에 힘입어 1982년부터는 유럽에서부터 북미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상실치아 수복 방법으로 광범위한 시술이 이루어지며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한의학과 민간요법만을 이용해 구강 질환을 치료해오던 한국에서는 1876년 개항 이후 미국과 일본을 통해 근대 치과 의술이 도입되었다. 즉 1885년 미국인 선교사 알렌(Allen)이 제중원에서 발치를 시술한 것이 한국 근대치의학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1893년에는 일본인 노다 오지(野田應治) 가 인천에 치과의원 개업을 하고, 1907년부터 한국인 입치사가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구강 질환을 치료하는 치과 진료가 시작되었다.

 

당시 최초의 한국인 치과의사는 함석태 선생이었다. 그는 1912년 일본치과의학전문학교(현 일본치과대학)를 졸업하고 1913년 말에 귀국한 후 1914년 2월 5일, 조선총독부에 한국인 치과의사면허 제1호로 등록하였다. 그리고 1914년 6월 19일경 서울 삼각정(三角町) 1번지 옛 제창국(濟昌國) 자리 동쪽에 ‘한성치과의원’을 신축하고 개업하였다. 1925년에는 경성치과의학교에서 첫 졸업생이 배출되자 한국인 치과의사 7명을 규합하여 한성치과의사회를 설립하고 회장에 추대되었다. 독립운동가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과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인 김약수(金若水) 등의 치아도 치료했다. 선생은 사이토 미노루(齋藤實) 총독을 저격한 강우규(姜宇奎) 의사의 손녀 강영재(姜英才)를 맡아 키워 이화여전을 졸업시켰다. 함석태 선생은 유명한 고미술품 수집가로 알려졌지만 1844년 미술품들을 세 대의 차에 나누어 싣고 고향인 평안북도 영변으로 월북한 후 소식이 끊겼다.

 

우리나라 치의학 교육기관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의 전신이 된 경성치과전문학교와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의 전신인 ‘쉐프리(W.J. Sheifley)’의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교실 중 어느 것이 최초의 치과 교육기관인지는 현재까지도 논란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김영진 전 치문회 회장

 

- 치의학박사

- 전 대한치과의사문인회 회장

- 전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심사위원